노승택과 채승우, 국기로 상징하는 '권위'에 어퍼컷

1, 2-노순택 '국기사용법'
3, 4-채승우 '깃발소리'

타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는 가슴을 찡하게 한다고 한다. 물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경기에서 우승 했을 때 우뚝 솟아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찡하다. 그러나 태극기가 민망한 경우도 있다. 일본프로야구 리그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가 태극기를 펄럭이며 운동장을 돌았다.

각 언론은 그 사진을 게재했으며, 네티즌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만약, 우리나라 프로야구 리그에서 우승한 일본 선수가 일장기를 들고 뛰었다면 어땠을까? 작업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곳곳에는 오늘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도 있었으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 질 때에도 펄럭이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었고 이를 추모하며 사람들은 태극기를 게양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러한 태극기 사용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사람의 죽음에 태극기는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북한을 방문 했을 때,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광적으로 태극기와 인공기를 흔들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되는 상황. 그렇다면 올바른 태극기 사용법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 태극기는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한 밤에 우뚝 솟아 있는 붉은 십자가보다 많았다. 학교에 있었으며, 관공서에 있었으며 건물 곳곳에 있었으며, 국기함에 정성스레 안치되어 어느 누구의 집에나 있었으며 하늘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오후 5시가 되면 허겁지겁 찾은 태극기 앞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민족과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도덕 교과서를 통해 태극기 접는 방법과 펴는 방법을 배웠으며,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태극기가 비라도 맞을까봐 걱정하며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으며, 더러워진 태극기는 버리지 않고 태워야 했다. 이 당시 태극기는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는 감시의 눈이었으며,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공포의 상징이었다.

내 생에 첫 국기 사용법

당시를 소회(所懷)하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른다. 언제나 그랬듯이, 6월 어느 날 미술 시간에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 하단에는 '잊지 말자 6.25'를 온갖 정성을 다해 쓰고, 화면 중앙에는 전쟁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탱크와 군인을 좌우에 배치했다.

서로에게 날아가는 총알도 그려 전쟁의 긴박함도 표현했다. 그런데 문제는 좌측과 우측에 자리한 군인과 탱크의 모습이 같았다. 즉, 그 그림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우리 편'을 표시하는 장치로 탱크에 태극기를 그렸다.

같은 방식으로 북한을 표시하고 싶었으니, 인공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나쁜'을 대표하는 일장기를 그렸다. 적군과 아군을 가르는 기표가 나의 생에 첫 번째 국기 사용법이었다.

나름 긴장감도 있고, 전쟁의 참담함까지 그려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선생님은 태극기를 잘못 그렸다고 하면서 일장기를 표현한 빨간 색 원에 파란색을 칠하고, 주변에 검은 선을 그어 적을 표시했던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꿔 놓았다. 선생님이 수정한 그림에는 적군이 아군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우리'를 대표하는 태극기를 사용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려 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들의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인공기(일장기)를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적이 아니었으며, 태극가 아래 있다고 그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생님은 태극기 앞에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태극기가 여전히 바람에 펄럭입니다.

1990년 들어 '세계화'에 피치를 올리던 태극기는 여타 다른 나라의 국기와 함께 걸리는 경우가 잦아지며, 우리 사회에 태극기의 등장은 현저하게 줄었다. 이제 오후 5시가 되어도 더 이상 태극기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잠잠하던 태극기가 등장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이다.

그런데 이전의 단순한 사용법과는 다른 새로운 사용 방식을 선보이며 태극기는 부활했다. 거리고 나온 붉은 악마의 손에서 펄럭였으며, 태극기를 잘라 티셔츠를 만들기도 했으며 반으로 접어 치마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망토처럼 두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난 시절 태극기가 지녔던 높은 권위는 진정 사라졌는가?

노순택과 채승우는 이 답에 부정적이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태극기 앞에서 여전히 '우리는 하나'를 외치고 있다고 고발한다. 2002년 월드컵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채승우는 다양한 태극기 사용법을 담았다. 붉은 악마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깃발을 흔들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커다란 태극기가 덮고 있다. 여기서 태극기의 실체는 '우리는 하나'라는 상징체이다. '우리'를 상정하고 태극기 아래 똘똘 뭉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에서 '그/그녀'를 배제한다. '우리'의 조건에 맞지 않는 돌출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우리'가 아닌 '그/그녀'의 범주로 분류된다.

태극기를 망토삼아 걸어가는 두 소녀 옆을 걸어가는 노점상 아저씨를 찍은 사진에서 태극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 아저씨는 낯설다. 그곳에는 '다름'과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같음'만 있을 뿐이다.

노순택의 <국기 사용법> 연작은 국기의 다양한 사용법을 제시한다. 경제발전용, 국토수호용, 전쟁기념용, 독도수호용, 집안 장식용, 한미혈맹지속용, 술집 장식용 등에 사용된다. 태극기라는 동일한 기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다양한 기의로 변한다.

불법 폭주족이 흔들던 태극기가 공식적인 광복적 행사에서도 흔들리고, 술집 장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무수한 기의의 변용은 결국 태극기가 텅 빈 기표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권위도 없으며, 태극기의 권위를 만드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그 주변의 상황일 뿐이다.

노순택은 태극기에 과도하게 내재된 권위를 유형학적 접근하여 태극기의 권위가 허상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태극기는 분단 한국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작동했다. 이제 그 짐을 덜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무심히 버리고 간 태극기처럼(노순택, <국기 사용법 012>).

높은 하늘에 우뚝 솟아, 또는 실내 공간에 중앙에 놓여, 또는 관공서에서, 사람들의 가슴에서, 폭주족의 거침없는 질주에서 태극기는 여전히 자기의 위상을 자랑하며 바람에 펄럭인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의 태극기 사용법이 궁금하다. 노순택과 채승우가 보여준 기발한 사용법 같은.



이대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