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하이퍼리얼리즘 팝아트 지류 아닌 새 매체 자체의 양식적 표현

찰스 벨, Marbles IX
로마의 학자 루키아노스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가 그린 켄타우로스 가족을 주제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 "그림 윗부분에 켄타우로스가 웃음을 머금고 파수꾼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레싱은 루키아노스의 기록이 제욱시스의 그림에 대해서 매우 부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레싱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켄타우로스가 가족들 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켄타우로스가 화면에서 가족들 위에 위치하는 것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저부조조각의 구성기법에 따라 실제로는 뒤에 존재하는 인물을 화면에서는 위에다 배치한 결과였다.

말하자면 오늘날 회화와는 다른 '양식'(style)의 결과였다. 그런데 매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한 시대의 '양식' 또한 당시의 매체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제욱시스의 그림에 나타난 원근법이 르네상스 이후의 선원근법과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 것은 유화라는 매체가 아직까지 발명되지 않은 것과도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

이 말이 다소 의아하다면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예를 들어보자. 이 그림은 미국의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 작가 척 클로즈(Chuck Close)의 자화상이다. 극사실주의라는 명칭에 맞게 정말로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이다.

과거 바로크 시대의 자화상 화가로 유명한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과거의 자화상과 달리 화가 자신의 주관적 정감에 좌우되지 않고 냉정하게 자신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척 클로즈의 그림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냉정한 묘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척 클로즈, Big self portrait(왼쪽). 정종기, 그들만의 언어
그 이유는 척 클로즈가 렘브란트보다 자신에 대해서 더 냉정한 시선을 갖고 있거나 혹은 더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능력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잠시 미루고 또 다른 극사실주의 작품을 보자. 이 그림은 찰스 벨(Charles Bell)의 작품이다. 투명한 구슬을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세밀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진짜 구슬을 눈앞에서 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그릴 수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그림의 놀랍도록 정밀한 묘사의 열쇠는 우리 눈의 정확성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눈의 부정확성을 증명할 따름이다. 무슨 얘기냐면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구슬이 아닌 카메라로 찍혀진 사진의 구슬 이미지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눈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눈과 대상이 맺는 꼭지 점의 각이 넓어져서 대상을 정밀하게 볼 수 없다. 만약 구슬을 1센티미터 앞에서 본다면 멍한 이미지만이 보일 것이다. 이 그림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접사(클로즈업)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인간의 눈에 드러난 이미지가 아닌 사진의 이미지인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있기 때문에 이 그림이 가능한 것이다.

척 클로즈의 자화상이 제기한 문제의 답도 이제 쉽게 풀릴 것이다. 렘브란트보다 클로즈의 자화상이 더 정확한 것은 클로즈의 통찰력이나 우월한 테크닉 때문이 아니다. 클로즈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의존하는 반면 렘브란트는 기껏해야 지금보다도 훨씬 못한 청동거울에 의존하였다.

두 화가의 자화상에 나타난 양식의 차이는 매체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거울이라는 매체를 드러낸다면 클로즈의 자화상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드러낸다.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하이퍼리얼리즘은 단순한 팝아트의 한 지류가 아닌 새로운 매체 자체의 양식적 표현인 것이다.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종기의 그림 '그들만의 언어' 또한 사진이라는 매체와 무관하지 않다. 얼핏 보면 일상적인 눈에 드러나는 한 장면인 듯 보이지만 이 장면은 사진에 담긴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사진은 한 순간을 매우 빠른 속도로 뜯어내어서 그것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반면 인간의 눈은 그러한 능력이 없다.

정종기의 그림은 매우 극사실적인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미지의 생생함을 전달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들이 생생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미 사진의 이미지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은 그 자체가 완벽한 리얼리즘이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가 회화적 양식으로 드러난 하나의 시대적 양식일 뿐이다.

회화와 매체가 맺는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미래파 회화의 경우일 것이다. 이태리의 미래파 화가인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의 그림은 미래파의 슬로건에 적합한 역동적 동작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우리가 보는 만화에서도 익숙한 표현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빨리 뛰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움직이는 발을 한 장면에 담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발라의 그림 이후에 일반화된 표현방식이며, 발라의 그림 이전에 이렇게 분명하게 움직임의 동작이 일정한 시간단위로 나누어져 표현된 적은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발라의 이 그림을 연속사진 촬영가 쥘 머레이(Etienne Jules Marey)의 사진과 비교할 때 발견된다. 이 사진은 프랑스의 한 병사가 걷는 모습을 연발카메라로 연속촬영한 뒤 하나의 사진으로 인화한 것이다.

발라의 그림과 머레이의 사진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머레이의 사진은 1896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만들기 바로 직전인 1885년경에 찍은 것이다. 더군다나 머레이의 이 연속사진은 사실상 영화의 전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영화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자면 발라의 그림은 단순히 사진이라는 매체가 아닌 머레이의 연속사진 혹은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비록 발라 자신이 연속사진이나 영화의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해서 이러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연속촬영 혹은 영화라는 매체의 발전과 동떨어져서 결코 이러한 그림의 탄생은 상상할 수 없다. 회화는 맨 눈에 드러난 사물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듯 보이지만, 결코 당대의 매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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