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차학경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서 천제적 예술 활동 펼쳐

망명자(Exilee)
세 개의 17인치 브라운관. 어린 시절 추억인 듯한 편지·사진 등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합성어인 짧은 텍스트가 시차를 두고 나열된다.

"끄지마", "켜지마". 다소 우울한 음색의 여성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프랑스어 억양의 한국어다. 각 화면에 나오는 이미지와 소리도 시차가 있다.

재미 한국인 아티스트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차학경(Theresa Hak cha·1951~82)의 미디어아트, '통로/풍경(Passages Paysages. 1978)'이다.

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제 1회 오프 앤 프리 영화제 특별전을 맞아 한국에 왔던 차학경의 7개 작품은 3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절하지 않았다면 백남준을 뛰어넘었을 법한 이 천재 아티스트는 단 10여 년 동안의 예술활동 끝에 서른 두살의 나이로 괴한에게 피살당한다. 서구에서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아온 그의 작품세계와 천재성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로서 그가 남긴 예술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영상·언어·텍스트·음성·스토리·퍼포먼스를 동원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섰다. 복합적인 매체를 활용한 탈 장르적인 방법을 도입한 개념예술의 선구자다.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62년 부모를 따라 11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를 배경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차학경의 작업은 주로'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의 자신의 이중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는 무게감 있는 예술철학과 주제의식으로 주목받았다.

'디아스포라(이산)'의 정서는 차학경을 응축할 수 있는 가장 큰 주제의식이다. 망명자(Exilee. 1980)란 작품은 이런 정서를 잘 드러낸다. 벽면 중앙의 흑백 브라운관에 구름과 꽃신, 막사발을 비롯한 한국적 상징물이 나온다. 불어와 영어의 중간 텍스트가 등장한다. 저속 촬영된 프로젝터 영상이 브라운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화분과 창을 비롯한 현재적 공간을 투사한다. 다소 음울한 목소리로 영어와 불어의 혼합어가 나열된다.

김지하 영화제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이는 78년 모국방문에서 경험한 이중적 소외를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차학경은 81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

'텍스트'를 비틀어 자신의 이중심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언어 유희'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에서 exile은 유랑을 ile은 섬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한 e는 불어로 여성을 뜻한다. 성조기를 형상화한 '아메르 카 (Amer, ca. 1978)'에서 amer는 불어로 쓴맛을 의미한다. a mer는 바다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 대한 이중감정과 이중정체성으로 해석된다.

'여성'으로서 그의 작품은 여성주의(페미니즘)의 가치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그가 남긴 불어, 영어, 그리스어, 중국어, 한국어 혼용저술인 '딕테(Dictee. 1982)'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의 각 장에는 테레사 수녀, 잔다르크, 유관순을 비롯한 역사상 유·무명의 여성이 복합화자로 등장한다.

김홍희 경기도미술관 관장은 이를 역사적 여성과 자신, 자신의 어머니 허형순과 동일화함으로써 여성 역사를 소외시킨 부계적 젠더 구조에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차학경은 중국 만주에서 모국어를 억압당한 채 교편을 잡았던 부모, 오빠와 함께 미국 하와이를 거쳐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는 90년대 개념미술이 유행하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차학경 작품은 92년 미국 뉴욕 전시회를 필두로 200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안토니오 타피레스 미술관 특별전 등에서 주목받았다.

그의 모교인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아트 뮤지엄에는 차학경 아카이브를 따로 두고 작품을 보관하고 있다. 그의 작품 '딕테'는 미국대학의 비교문학 교재로 쓰인다. 저작권은 버클리의 것이다.

그의 오빠 차학성(64·재미 번역가)씨는 지난달 2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시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라 (차학경이) 모국어가 뭐냐는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었으며, 늘 실존을 고민하는 작품활동을 했다"며 "당시 개념미술 장르가 한국에는 거의 없어 잘 이해되지 못했었지만 최근에는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통로/풍경(Passages paysages)
김홍희 관장은 "사후 프로모션이 잘 안돼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70년대에 이미 기호학을 영상으로 만들었다는 점, 개념예술의 선구자로서 차학경의 가치는 남다르다"며 "이중정체성을 반영하는 미학, 실존에 대한 예술,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점 등이 지성서클을 중심으로 회자돼 왔고, 현재적 의미가 폭넓게 재조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 참고

<후기식민주의 페미니즘 시각에서 본 차학경의 작품세계> 김홍희. 2009.
<차학경의 영상작품에 나타난 전치, 해체, 변형, 융합의 의미> 정재형. 2009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