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기획·제작한 발레 서커스 '시르크 넛' 틈새시장 노려

"빰빠빠빠 빰빰 빰빰빰-" 차이코프스키의 익숙한 음악이 시작되면 무대에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대가 다르다. 관객들이 액자형 무대 앞에 앉아 일방향적으로 관람하는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니라, 거의 사방으로 열려진 공개형 무대다. 주로 야외 공연이나 서커스 공연에 어울릴 만한 콘셉트다.

이윽고 주인공의 판타지가 시작될 즈음엔 정말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을 하는 공연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존 이야기의 틀에서 벗어나 현란한 텀블링을 보여주는가 하면, 무용수 사이에서 에어리얼 후프(천장에서 이어진 고리에 매달린 채로 구사되는 동작 기법)를 보여주기도 한다. 발레인가, 서커스인가. 말 그대로 발레 서커스라는 새 장르를 표방한 <시르크 넛>의 한 장면이다.

'아트서커스'라는 서커스의 새 장르를 개척한 '태양의 서커스' 시리즈가 기존의 서커스 레퍼토리에 서사를 끌어와 극적 요소를 보완했다면, <시르크 넛>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검증된 서사에 서커스가 결합된 형태다. '아트서커스'와 '시즌 발레 레퍼토리'라는 킬러 콘텐츠의 결합은 상이한 두 분야의 관객에 어필하는 동시에 새로운 틈새시장을 노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만큼 두 분야를 맡은 이들은 각각 발레무용수와 서커스단원들이다. 벨라루스 국립발레대학과 벨라루스 국립서커스단으로 구성된 출연진은 역시 '볼쇼이'로 유명한 러시아 발레와 서커스의 영향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을 기획한 것은 예상 외로 한국이다. 국내 공연기획사 J&S 인터내셔널이 기획제작하고, 50명이 넘는 출연진은 전원 명재임 총예술감독이 현지에서 직접 섭외와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말하자면 <시르크 넛>은 벨라루스산 재료를 가지고 만든 '한국 상품'인 셈이다.

4년 전에 우연히 공연 제작 의뢰를 받은 명재임 예술감독은 그때부터 세계 각국의 서커스를 섭렵하면서 <시르크 넛>의 초안을 기획하게 됐다. "오래 전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접할 때마다 가장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접목할 수 있는 클래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서커스에 융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발레도 서커스도 아닌 제3의 장르 혹은 그 경계에서의 작품이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미 '태양의 서커스'가 선점한 아트서커스의 영역이 있고, 무엇보다 '발레 서커스'라는 장르 자체가 이도저도 아닌 흐지부지한 공연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 예술감독은 <시르크 넛>의 구성에서 발레와 서커스를 같은 무게로 융합하며, 서커스 공연 자체를 예술적으로 풀어낸 '태양의 서커스'와 거리를 뒀다.

성격이 다른 발레의 리듬과 서커스의 리듬을 어떻게 맞추느냐도 난제였다. 명 예술감독은 "서커스의 동작에 적절한 음악과 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클라이막스가 잘 표현되어 관중들에게 전달되는데, 발레 음악에 서커스의 다른 리듬을 입히는 것이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 실제로 공연 중 발레와 서커스 부분이 겹칠 때 이런 점이 보이기도 하지만, 명 예술감독은 공연을 거듭할수록 이런 점을 보완하며 더 자연스러운 공연을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서커스는 두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최근 몇 년동안 '태양의 서커스'의 붐으로 일어난 첨단 공연상품이다. <퀴담> 이후 아트서커스 붐이 일어나며 <알레그리아>와 다른 단체의 작품도 국내에 잇따라 소개되고 있다. 또 하나는 '동춘서커스'로 대표되는 소박한 천막공연이다. 오랫동안 이 땅에서 함께해왔던 동춘서커스보다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태양의 서커스'가 먼저 떠오르게 된 현실은 우리가 '서커스'라는 문화상품에 대해 그만큼 방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최근 오랫동안 경영난을 겪고 있던 동춘서커스단(단장 박세환)은 계속된 불경기와 신종플루 유행으로 인한 불황으로 하마터면 84년 전통의 맥이 끊길 뻔했다. 다행히 소식을 들은 관객들의 작은 성원과 지자체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하긴 했지만, 전망이 어두운 상황은 여전하다. 동춘서커스는 북한의 평양교예단, 러시아의 볼쇼이 서커스, 상하이 서커스월드와 함께 기량으로는 높은 수준을 자랑하지만, 현대의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기량 그 이상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가 인기를 끌기까지 서커스는 다른 나라에서도 대중의 주목을 받는 공연은 아니었다. '태양의 서커스'는 기존 서커스의 관행을 모두 뒤집어 광대의 원맨쇼와 동물 묘기쇼 등의 구태적 프로그램을 줄이고 마임, 뮤지컬, 발레, 체조 등 모든 흥행 요소들을 하나의 서사로 이어붙였다. 관객의 취향을 읽는 감각과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는 전복적 사고가 '태양의 서커스'가 블루오션을 개척한 키포인트였다.

<시르크 넛>이 공연 시작 전부터 주목을 받은 이유 역시 비슷한 데 있다. '태양의 서커스'의 성공을 '선도자의 법칙'(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시장에서 승리한다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발레 서커스라는 분야를 개척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연 중이지만 <시르크 넛>은 국내외 공연예술 관계자들로부터 창의성과 대중적 재미를 인정받아 벨라루스를 비롯해 영국, 스페인, 중국 등에서의 투어가 예정된 상태다.

또 비록 외국의 출연진으로 구성된 공연이지만, 무엇보다 한국이 주도해서 아트서커스의 연장선상에서 서커스의 틈새시장을 발견한 것도 고무적이다. 현재 명재임 예술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한국무용과 서커스의 접목을 기획 중이다. 참신한 기획과 기업들의 투자, 그리고 높은 기량의 출연진의 만남으로 국내에서도 서커스 공연의 진화가 시작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