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영화 '여배우들'그녀들의 열망 고통 습관 고민 담긴 솔직함에 관객들 즐겁게 취해

어린 시절 제일 듣기 싫었던 어른들 말씀이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느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여성의 존재를 폄하하는 말로도 들렸지만 특히 '여성의 수다'를 경계하는 듯한 뉘앙스가 강해 더욱 거부감이 심했다.

남자는 마음껏 떠들어도 되고 여자는 모임은 물론 수다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속설을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마음속에는 교묘한 이중잣대가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절대 수다쟁이 여자는 되지 말아야지.' '수다쟁이 여자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둬야지.' '수다를 너무 많이 떨면 왠지 깊이가 없어 보이잖아!' 그런데 이런 식의 마인드 컨트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다에 대한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수다에 대한 갈망도 심각해졌다.

나는 여고시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어살면서도 주말이 되면 미치도록 수다가 '고파서' 전화통을 붙들고 살았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기가 불덩이가 되도록 친구와 통화하고도 늘 클로징 멘트는 둘 중의 하나였다. "어, 내가 또 전화할게." "응,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수다를 밥 먹듯이 떨어댔지만 '의식적'으로는 늘 다짐했다.

난 수다쟁이가 아니야, 친구는 되도록 '과묵한' 사람을 사귀어야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는 되도록 입을 다물어야겠다, 수다쟁이처럼 보이면 안되니까. 하지만 그건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이상적 이미지였을 뿐, 현실 속의 나는 하루라도 수다를 떨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수다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면서 수다에 대한 남모를 죄책감을 떨쳐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다만큼 화끈한 우울증 치료제는 없다.

일단 돈이 들지 않고, 두 사람 모두의 기분이 좋아지며,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받았다는 식의 부채관계가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수다를 떨면 떨수록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돈독해진다.

운이 좋으면 세 사람, 네 사람끼리도 '수다의 치유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수다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창작의 뮤즈다. 굳이 엄청난 투자를 하지 않고도 우리는 수다를 통해 뜻밖의 소중한 아이디어를 얻고, 각자가 겪어낸 다채로운 경험을 공유한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 <여배우들>을 보며 수다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신나게 예찬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6명의 여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패션화보를 찍는 상황설정보다 더욱 드라마틱했던 것은, 이 영화자체가 특별한 '반전'이나 '기교' 없이도 단지 그녀들의 '수다의 성찬'만으로 거뜬히 지탱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다가 비난 받는 이유는 그 '비실용성'과 '무목적성'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수다의 문화적 파괴력을 모르시고 하는 말씀이다.

<여배우들>에서 여섯 명의 여배우들이 처음 모였을 때 그들은 편하게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다. 윤여정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후배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이미숙과 고현정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쎈' 여배우들이라 후배들은 더더욱 말을 섞지 못한다.

시종일관 수다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이미숙과 고현정이지만 수다의 기능은 단지 '떠드는 것'이 아니다. 넌 왜 그렇게 말이 없냐는 핀잔을 듣고도 가만히 미소 지으며 "전 듣는 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김민희의 태도야말로 수다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수다는 반드시 '듣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청중이 없다면 그저 서글픈 독백에 지나지 않을 대사들이, 따스한 공감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명대사의 별자리들을 새긴다.

수다에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서로를 물어죽일 듯 팽팽한 긴장감을 발산하던 고현정과 최! 지우도 두 시간 여의 수다의 카니발 끝에 별다른 화해의 과정 없이도 어느새 스리슬쩍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수다에는 일단 토해내고 나면 어떤 슬픔도 어떤 고통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한 카타르시스의 힘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말도 수다의 포장지를 둘러싸면 부담이 적어진다.

던지기 전에는 한없이 무겁지만 던지고 나면 한없이 가벼워지는 수다의 주사위. "그러니까 (시댁에서) 쫓겨나지." "남들도 다 이혼하는데, 여배우가 이혼하면 주홍글씨냐." "난 이영애를 누르고 싶어, 난 김혜수도 누르고 싶어." "좋은 얘기만 하면 지루하잖아요. 우리가 뭐 EBS야?" "송혜교가 중국시장, 최지우가 일본시장이면 나는 재래시장이나 맡아야겠다." "전 인생이 재미없어요. 친구들 만나도 재미없고 여행을 가도 재미가 없고 남자친구랑 있어도 재미가 없고 혼자 있으면 더 재미없고." "우린 정말 아내 같은 남편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요 선배님?" "저도 한대 피워도 될까요. 선생님?"

이미지가 곧 생명인 이 아름다운 여배우들에게 이런 자극적인 대사들은 결코 쉽지 않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주사위처럼 일단 툭 던져지자 그녀들의 수다를 듣는 관객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숨겨온 그녀들의 열망과 고통과 습관과 고민이 수다의 술잔에 담기는 순간. 관객들은 그녀들의 수다에 담긴 솔직함의 농도에 즐겁게 취해버렸다.

수다 앞에서 우리는 모든 거추장스런 계급장을 떼고 불현듯 평등해진다. 우리는 수다를 떤다고 부채를 지지도 않고 수다를 듣는다고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친구A가 돈 때문에 고민할 때 친구B가 돈을 빌려 주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눈물 콧물 죄다 뿜어내며 실컷 수다만 떤 친구와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수다를 통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듯 하면서 모든 기쁨을 안겨줄 수 있고 아무 선물도 받지 않은 듯 하면서 모든 기쁨을 챙겨 받을 수도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을 기쁘게 해주고, 또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아무런 물리적 '현물'도 이동하지 않았지만, 들은 사람도 떠든 사람도 모두 한껏 배불러지고 시원해지는 순수증여의 무한만족. 그것이 수다가 창조하는 영혼의 파라다이스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