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2)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커피<런웨이> 편집장 미란다의 정체성 담긴 스타벅스 커피
몇 해 전 한 프랜차이즈 업체 CEO를 인터뷰할 때, 이 CEO가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20세기와 21세기 문화를 대표하는 음료는 와인과 커피인데, 그 이유는 알코올과 카페인이라는 재료 특성에 있다는 것. 고로 이 음료의 정체성은 20세기와 21세기 '시대적 요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일찍이 '경영학'이란 시장 결과에 따른 귀납법적 추론과 '그렇게 믿고 싶은' 자유 의지(경영인들의 그 정체모를 자신감과 '긍정의 힘')에 의존하는 바, 레스토랑에 이어 조만간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계획 중인 CEO의 허무맹랑한 소리라 치부했지만,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하니 꼭 틀린 말도 아닌 듯 보였다.
고종황제부터 맛보기 시작해 이제 우리민족 생활필수품처럼 된 커피(Coffee). 그 어원은 카페인이다. 이 어원에 커피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바로 각성효과와 중독성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책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에서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스타벅스를 통해 세계사를 훑는다. 그는 스타벅스가 무서울 정도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인에게 특별하다고 느끼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며 커피의 각성 효과에 주목한다. 근대가 가진 '잠에서 깨어 있는' 느낌과 궁합이 잘 맞는 음료로 세계를 바꿔놨다는 것이다.
물론 커피 이외에도 카페인이 든 음료는 무궁무진하지만, 커피가 카페인의 대표 음료처럼 각인되는 현실에서 이 견해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누구나 잠을 깨기 위해서는 녹차보다 커피를 찾고, 커피중독자는 심심치 않게 있지만 녹차나 홍차중독자란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경쟁사회에 사는 현대인은 늦은 시간까지 노동해야 하고, 마시면 잠 오는 술보다 마실수록 잠이 깨는 커피를 찾게 되는 게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러다 보면 당연히 중독이 될 터, 기실 커피는 21세기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음료다.
하루에도 서너 잔은 입에 달고 살아야하는 커피는 노동에 중독된 현대인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 아닐까.
미란다와 스타벅스
물론 영화의 대중적 성공은 이런 정치한 설정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대중이 '믿고 싶어하는' 판타지, 주인공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 분)가 처한 그 환상적 업무 환경에 있을 터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옷 방에서 샤넬과 프라다의 최신 원피스를 입을 수 있고(단, 사이즈가 있다면), 발 뒤꿈치가 벗겨질 때까지 지미추 하이힐을 갈아 신을 수 있는 꿈의 직장은 여성은 물론 패션에 관심 많은 10~20대 남성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구치와 프라다 핸드백에 정신이 팔려 '나도 저런 잡지사에 근무했으면'하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결코 <런웨이>의 편집장이 될 수 없다. 영화의 원작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국판 추천사에 쓰인 말처럼, 한국에는 그런 잡지사가 없을뿐더러,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와 비서 앤드리아 삭스의 차이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니까.
똑같은 원피스에 어떤 허리띠를 채우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편집장을 보며 "제 눈에는 똑같아 보는데요"라고 킥킥거리는 앤드리아에게 미란다는 하이킥을 날린다.
"네가 모르는 사실은, 그 파란색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파란색 중에서도 터쿼즈(Turquoise)색이 아니라 정확히는 세룰리언(Ceruliean)색이지. 2002년에 오스카 데 라 렌타가 셀룰리언색 이브닝 가운을 발표했고, 다음에 입생로랑이 세룰리언색 군용 재킷을 선보였지. 그러자 세룰리언색은 급속하게 퍼져나가 8명의 다른 컬렉션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백화점을 거쳐서 네가 옷을 사는 그 끔찍한 캐주얼 코너로 넘어가게 된 거지. 네가 입고 있는 그 파란색은 셀 수 없이 많은 일자리와 수백만 달러의 재화를 창출했어."
미란다는 패션과 경제시장의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이 메커니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 역시 알고 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정도 차별성은 있어야 편집장이 되는 게다. 그러니 앤드리아는 입 다물고 커피 심부름을 할 수 밖에 없다.
출근 첫날부터 긴급비상사태로 새벽부터 불려간 앤드리아는 24시간 울려대는 핸드폰과 미션 임파서블한 편집장의 지시에 시달린다. 이를테면 제 아이에게 보여줄 해리포터 신작을 미리 구해달라는 지시 같은 것 말이다.
수십 개의 비서 임무 중 하나는 아침마다 미란다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코트와 핸드백을 정리하는 것과 스타벅스 커피를 대령하는 일이다. 앤드리아는 꼭 편집장의 출근 10분 전 따뜻한 스타벅스 커피를 대령해야 하고, 미란다는 이 커피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영화 속 미란다의 정체성은 데니스 바소의 퍼 코트나 도나카렌의 블랙 드레스가 아니라, 이 커피에 담겨 있다. 사이토 다카시가 스타벅스 성공 요인으로 지적한 '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일상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인간, 노동에 중독된 인간 말이다.
그녀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비서에게 해리포터 신작을 먼저 구해달라고 생떼를 쓰면서도 이 노동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 애정이 흘러 넘쳐 숭배에 가깝다. 비서직을 박차려는 앤드리아에게 미란다는 말한다.
"누구나 우리 같은 삶을 꿈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란 단정은 자신의 노동과 그 대가로 보장받는 권력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 신념은 두 번의 이혼과 이혼을 둘러싼 무수한 가십에도 흔들림이 없다.
패션산업 헤게모니를 만드는 그녀는 자신의 '커리어'로 인해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이혼을 둘러싼 가십성 뉴스로 맘고생을 치르면서도 편집장을 그만 둘 생각 같은 건 결코 하지 못한다. 한번 길들여지면 절대 멈출 수 없는 것, 미란다에게 노동하기와 커피마시기는 동일한 행위다.
책상 위 말라가는 커피
남의 말 할 것도 없다. 지금 당신의 사무실에도 마시다 만 커피'들'이 뒹굴고 있지 않은가. 잠부터 깨고 보자며 출근하며 마신 1회용 인스턴트 커피부터 "이것도 못 사먹냐?"고 사마신 '스타벅스' 커피와 야근 피로를 달래면서 우겨넣은 캔커피까지, 커피는 기호식품을 넘어 21세기 현대 사회의 상징이 됐다. (엣지있는 미란다는 스타벅스만 고집하겠지만,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다.) 이제 우리를 호모커피우스, 호모스타벅스로 명명합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