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만나던 날'
작가 원덕희가 보여주는 바다는 결코 자기만족을 통한 삶의 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기억의 흐린 단편들이 위장하는 현실의 피난처일 뿐이다.

바다는 작가의 고향이 아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삶의 굴곡과 물질의 유혹을 지나 홀연히 찾은 곳, 삶의 육중한 갑옷을 던져 버리고 영원히 지우지 못할 죽음과 생의 진실을 찾아 떠난 곳, 그리고 어두운 암실에서 스스로의 만족과 희열을 발견한 곳, 바로 그곳이 바다이다.

결국 작가의 렌즈를 통해 은밀히 드러나는 것은 진술을 위한 재현이 아니라 삶의 편린에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진실, 예컨대 인적 없는 거리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봉지, 누군가의 죽음을 위해 땅을 파다 버려진 곡괭이,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처럼 출현과 부재 그리고 존재와 허무 근처에서 맴도는 삶의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작가의 바다는 사진으로 전이된 신호의 순수 서정시임과 동시에 어느 음유시인의 노래와 같이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피안의 장소로서 위대한 바다가 된다. 8월 4일부터 8월 17일까지. 갤러리 나우. 02) 725-2930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