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디지털 미지어 통해 현실과 가상 겹쳐진 새로운 현실 만들기 쉬워져

구로스키, 바레인 'F1'
예술품과 일상의 물건을 구별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발동시키는가의 여부이다. 사르트르가 제안한 이 기준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공감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컵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컵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다른 상황이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로코코의 장식이 된 가구는 그저 눈을 즐겁게 만드는 장식물이지만, 와토(Jean Antoine Watteau)의 그림은 프랑스 궁정의 화려한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그곳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상상을 자극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상이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상상이 현재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상상이라 할지라도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주인공 모모코는 일본의 조그마한 시모츠마 현에 사는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로코코를 동경하여 로코코 회화에 나오는 공주 같은 화사한 옷을 입고 다니며, 머릿속에는 항상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장면으로 가득차 있다.

구로스키, '99센트'
조폭 출신으로 짝퉁 유명브랜드 제품을 팔고 있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그녀의 우울한 현실과 전혀 다른 상황만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은 모모코가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다. 그녀에게 상상은 동떨어진 현실이 아닌 현실과 가상의 중첩인 셈이다. 그녀는 21세기의 시모츠마와 17세기 로코코 시대의 베르사이유가 중첩된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나 라캉의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력 혹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미건조한 삶에 내일의 희망을 중첩시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삶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견딜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이 개입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는 양날을 지닌 칼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잔인할 정도로 욕망이 제거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현실과 상상을 하나의 단일한 공간으로 중첩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로서 사진은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주로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된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어떠한 명분도 없는 공포와 살육의 현장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은 사진이다.

과장된 회화와 달리 사진에 드러난 전장의 모습은 오히려 상상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현실 자체이다. 사진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껏 포즈를 잡거나 귀여운 표정을 지은 모델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다른 적나라한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사진은 우리가 기대하는 현실의 모습을 배신한다.

하지만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특성 때문에 사진은 더욱 더 그럴싸한 현실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이미 아날로그 사진의 시대에도 그러한 연출이 가능하였지만,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을 통해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정연두 '낮잠'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과 가상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중첩시킨다. 그는 바레인의 포뮬러 원(F1) 코스를 찍은 사진작품을 무려 2년에 걸친 작업을 통하여 완성시켰다. 이 사진은 바레인에 설치된 F1 코스를 멀리서 찍은 단순한 사진인 듯하다.

하지만 구르스키는 이 자동차 경주 코스를 단순히 있는 그대로 찍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정교한 작업을 통하여 코스를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그는 코스의 형태 자체보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주는 선의 느낌에 관심을 갖고 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코스를 미묘하게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형된 이 사진이 바레인의 자동차 경주 코스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의 자동차 경주 코스는 이 사진의 현실적 지표(index)임에 틀림없다. 현실의 지표를 결여하는 순간 이 사진은 그냥 단순한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여전히 사진이다. 하지만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또 다른 세계인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99센트'라는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우 정밀한 방식으로 변형된 이 작품은 대형마트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법한, 따라서 매우 개연적인 현실의 모습이지만 정확하게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그는 상품이 진열된 마트의 모습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진열이 주는 극적인 느낌과 배열 혹은 색채의 조화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은 99센트라는 대량할인마트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할인물품들의 전시가 예상치 못한 독특한 배열의 시각적 효과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대량마트의 현실과 그 현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상적 세계를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연두의 작품은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활용하여 아예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 자체를 허물고 있다. 그는 사진에서만 하나의 판타지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로서의 사진 공간을 오히려 현실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이 미디어 속에서 자유롭게 판타지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동일한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현실 공간 자체도 하나의 유희공간으로 즐겁게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는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의 세계를 현실로 꾸며서 그것을 사진에 담은 일련의 작품이다. '낮잠'이라는 작품 또한 어린 아이가 낮잠을 자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현실 속에 실제로 꾸며서 사진에 담은 작품이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공간을 하나의 통일된 시점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이 그림을 보면 두 명의 어린이가 침대에 자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천장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하지만 침대 밑 방바닥에 놓인 시계는 벽걸이 시계로서 분명히 벽에 걸려 있어야 한다. 따라서 탁자 또한 반듯하게 세워져 있어야 한다. 반면 널린 크레파스는 분명히 땅바닥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종합해 보면 이 그림은 벽면과 바닥이 동일한 하나의 평면에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토록 달콤하고도 행복한 낮잠의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벽과 바닥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 강압적인 중력의 힘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달콤한 꿈과 같은 판타지의 자유로운 유희 공간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린 아이가 그린 이 유쾌한 판타지의 공간을 현실 속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판타지의 공간을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세계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 이러한 판타지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현실 공간을 찍은 사진은 어린 아이의 그림과 매우 흡사하며, 우리는 사진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진 속의 공간이 현실 공간이라고 쉽게 전제한다. 하지만 사진이 아닌 실제 공간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다소 난잡스럽고 혼란스럽게 보일 뿐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판타지를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이라는 미디어가 단순한 현실도 아닌, 그렇다고 단순한 판타지도 아닌 두 세계의 중첩된 또 다른 세계라는 사실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영욱 미디어아트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