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얼굴학디지털 기술 자유로운 변경 통해 무한개의 얼굴 드러내

Francis Bacon, Self-Portrait, 1971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그린 그림은 전통적인 인물화와 다른 점이 있다. 인물의 모습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인물이 명확하지 않은 그림들은 베이컨의 그림 이외에도 많다.

게하르트 리히터는 인물을 그린 후 일부러 그은 자국을 내어 인물의 정확한 모양새를 훼손하며, 데쿠닝 역시 여인들을 다룬 연작 '여인'에서 여인의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를 그렸으며, 피카소가 그린 '컨바일러 초상'은 아예 그 그림이 자신의 절친 컨바일러를 그린 것인지 혹은 그저 하나의 추상화 작품인지 구별할 수조차도 없다. 인물의 모습이 단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베이컨의 인물화를 특징짓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철학자 들뢰즈는 베이컨의 인물화에 나타난 인물을 사람도 아닌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동시에 사람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한 형상(figure)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사람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한 얼굴의 형상을 들뢰즈는 '얼굴'이 아닌 '고기 덩어리'로 본다.

베이컨은 얼굴을 눈, 코, 입, 귀라는 반듯한 기관들이 모여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안정된 체계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그림에서 얼굴은 하나의 반듯한 기관으로서 눈, 코, 입, 귀가 아닌 눈, 코, 입, 귀처럼 보이는 고기 덩어리들이 뭉쳐진 더 커다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의 그림 속에는 '얼굴의 정치학'이 숨겨져 있다. 물론 들뢰즈 자신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얼굴의 정치학에 담겨진 담론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얼굴은 정면성을 전제로 한다. 정면의 얼굴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인식의 지표로 활용된다.

Gerhard Richter, Confrontation, 1988
우리가 사용하는 신분증(ID)에는 모두 정면 사진을 부착하게 되어있다. 눈과 코, 입과 귀와 같은 신체기관을 뚜렷하게 드러낼뿐더러 가장 확실하게 그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유형학과도 관련이 있다. 신체기관이 하나의 유기적 체계를 이룬 얼굴의 모양새를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기호처럼 다룸으로서 다른 기호와 구별하는 것이다. 사람은 정면얼굴이라는 기호를 통해서 구분된다. 정면 얼굴을 찍은 증명사진은 말 그대로 증명사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얼굴 기호들과 구분되는 하나의 기호가 되는 셈이다.

더군다나 얼굴이 하나의 기호가 될 경우, 마치 기호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기호는 어떤 임의의 기준에 의해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가령 언어에서 기능에 따라 품사적으로 명사, 동사, 부사 등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표현에 따라 슬픔, 기쁨, 중립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얼굴 역시 어떤 기준에 따라서 유형적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진과 더불어 얼굴은 단순한 표식의 기호를 넘어서 유형학으로 확장되었다. 가령 알퐁스 베르티옹(Alphonse Bertillon)은 1882년 파리 경시청 '범죄자 신원 확인부'를 창설하고 범죄인의 초상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오늘날 몽타주의 전신이 된 그의 방법론은 범죄의 유형과 범죄자의 용모적 특성을 연결짓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눈과 코, 입, 귀, 얼굴의 대체적 윤곽이 각각 임의의 기준에 따른 유형으로 분류되고, 그렇게 분류된 각각의 기관들을 조합하면 얼굴 전체의 유형을 만들어낼 수 있다.

Willem de Kooning, Woman, 1949
이것은 아직까지도 범죄수사에서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범인의 얼굴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유형학은 푸코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권력의 작동방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은 이러한 안정된 유형학의 체계를 거부한다. 그의 그림에서 얼굴은 하나의 안정된 기호가 아니라 살덩어리로서 어떤 유형학적 분류도 거부하는 기호 이전의 상태인 '형상'에 불과하다. 베이컨의 그림에 나타난 얼굴은 들뢰즈가 아르토에게 차용한 '기관없는 신체'에 딱 맞아떨어진다.

'기관없는 신체'로서 얼굴이란 진짜 눈, 코, 입, 귀와 같은 신체기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눈, 코, 입, 귀가 하나의 고착된 기관의 형태로 굳어져 버리지 않은 원초적인 상태를 뜻한다. 어쩌면 부화된 알의 경우처럼 그것은 눈, 코, 입, 귀, 날개, 다리 등의 기관이 확고하게 구분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얼굴은 확고한 하나의 기호가 아닌 무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유형학은 이러한 무한개의 얼굴을 없앤다. 어떤 여성보다도 더 여성스러우면서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속에는 여성의 얼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남성다움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으며, 노인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모습까지도 숨어있다.

한 마디로 그녀의 얼굴은 천 개, 아니 수억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단일한 얼굴, 혹은 기호로서의 얼굴은 유형학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Pablo Picasso, Portrait of Daniel-Henry Kahnweiler, 1910
디지털 기술의 긍정성은 바로 이렇게 하나의 단일한 기호라는 신화를 폭로한다는데 있다. 크리히바움(Irene Kriechbaum)의 오스트리아 린츠의 한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여성 학우 48명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은 후에 그것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페이솔로지'(faceology, 얼굴학)이라는 생소한 작품명답지 않게 이 작품은 매우 평범한 작품이다. 하나의 패널에 각각 세 개의 사진을 붙여놓은 이 작품에서, 가장 왼편의 사진은 원래의 사진이며 오른 쪽 두 개의 사진은 변형한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48명의 학생들 모두 동일한 복장과 동일한 헤어스타일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화장도 배제하였다.

작가는 어떤 얼굴이 과연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며, 또 반대로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가가 얻은 결론은 수천 개의 다른 얼굴의 모습을 합쳐놓은 듯한 그러한 얼굴이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얼핏 가장 평범하고도 표준적인 얼굴이 호감을 준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가장 호감을 주는 얼굴은 약간만 변형하여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비슷해진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끌리는 얼굴은 그 얼굴 속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변종들을 감추고 있는 그러한 얼굴이다.

우리가 표준적이라고 생각하는 얼굴 속에는 가장 많은 변형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 기술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디지털 디자인은 주로 원형(prototype)과 매개변수(parameters)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디자인의 작업이 용이한 것은 어떤 원형(프로토타입)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직육면체 형태의 프로토타입에서 매개변수만 바꾸면 얼마든지 꽈배기처럼 꼬여진 형태로의 변형이 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은 사실상 아날로그 매체의 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이미지의 자유로운 변경이 매우 제약되어 있었다.

철학자 훗설(Husserl)은 사물의 본질을 '자유변경'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수히 많은 형태의 사각형을 그릴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사각형이 공통적으로 지닌 변경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각형의 본질인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는 이를 비웃는다. 사각형은 얼마든지 꽈배기 모양으로 변경될 수 있다.

하나의 얼굴은 더 이상 자유로운 변경이 제약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얼굴을 담고 있는 무한개의 얼굴이며, 디지털 매체는 매개변수들을 활용한 자유변경을 통해서 이러한 무한개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



박영욱 미디어아트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