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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 탈출한 '이발소 그림'들

<삼각지미술 예찬> 전
서구 명화와 대중 정서 사이 오가는 키치함에 대한 오마주
  • 류해윤, '내가 살던 故鄕집', 1999
삼각지는 오랫동안 한국미술의 사각지대였다. 인사동과 청담동의 화랑가가 미술 시장과 담론을 이끄는 동안 삼각지는 대중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한때 골목을 가득 채웠던 초상화 가게와 액자 가게도 많이 줄었다. 재개발 계획으로 주변 지형도 바뀌었다. 하지만 인사동과 청담동만큼이나 한국인의 미적 감각과 정서에 영향을 미쳐온 곳이 삼각지다.

한국전쟁 후 용산에 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삼각지에도 화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군을 대상으로 기념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초상화뿐 아니라 소위 '이발소 그림'들도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명화의 복제화, 쉽게 감상할 수 있는 풍경화와 정물화 등 이발소 그림들은 평범한 가게와 가정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전후 피폐한 환경 속에서 재능은 있으나 제도적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화가들이 삼각지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이중섭, 박수근 화백도 이곳을 거쳐 갔다. 이들의 작품은 70년대 후반까지 해외로 활발히 수출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삼각지 미술이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한국미술의 근간에 파고들어 있음을 말해준다. 중년 이상 세대에게 이발소 그림은 추억의 일부다. 어린 시절의 구석 구석에 놓여 있는 밀레의 '만종', 세잔의 정물화, 한국의 산수(山水) 중 대부분이 삼각지산(産)일 것이다.

  • 이준복, 'Pattern SA3OP0433-1', 2009
서구 명화와 대중적 정서 사이를 오가는 삼각지 미술의 키치함은 한국미술의 조류 속에서 변주되고 재조명되어 왔다. 정통 미술의 기법이 혼재되어 낳은 불균질함은 제도권 미술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특징이다. 민중과 대중의 시선, 일상의 맥락에서 미술을 고민한 많은 작가들이 이에 주목했다.

지난 10월1일부터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오래된 집'에서 열리고 있는 <삼각지미술 예찬> 전은 삼각지 미술을 사각지대로부터 끌어내려는 시도다. 전시를 기획한 황하연 큐레이터는 "삼각지 미술의 미적 가치와 그 의미를 찾아보는 실험이자 이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위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삼각지 미술의 영향력을 작품에 녹여낸 작가들이 모였다. 일종의 오마주 전시다.

류해윤 작가는 이발소 그림의 소재와 주제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산수화, 민화 기법이 정감 있고도 쾌활하게 활용되어 있다. 이는 작가가 자신이 보고 자라온 것들과 상상력, 향수와 희망을 재료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최석운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친근한 개와 돼지를 주인공 삼아 인간사회를 빗댄다. 이런 우화적 수사법은 전통 민화에서 쓰였던 것이다. 보름달 아래 근심에 차 있는 개, 머리에 꽃 달고 곁눈질하는 돼지는 유머러스하면서도 풍자적이다.

한때 삼각지에서 작업했던 민정기 작가에게 이발소 그림은 삶에서 태동한 민속 예술의 일환이다. 그는 그 정직함을 작품의 기초로 삼는다. 북한강변에 들어선 기도원과 호텔의 풍경을 평면적으로 옮김으로써 생경한 느낌을 극대화한 작품들이 한 예다. 1980년대에는 서울의 도시 풍광을 그렸던 작가는 최근 농촌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 민정기, '북한강변 리버사이드호텔', 1991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과도한 꽃무늬 속에 중년 여인들의 새침하고 도도한 자태를 포함시켜 놓은 이준복 작가의 작품은 이발소 그림을 소비해 온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패션 트렌드와는 무관하게 아줌마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아온 꽃무늬 옷처럼 이발소 그림도 미술 담론에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서민들의 생활을 위로해 왔다는 뜻이다.

황지윤의 산수화는 그야말로 인터랙티브한 그림이다. 풍경은 물론 신화적 요소, 민화적 요소를 숨겨 놓아 들여다 볼수록 많은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 낀 산 정상에 돌부처가 앉아 있는가 하면 달빛 드리운 강가에서 낚시꾼도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다. 붉은 꽃과 돼지 등 전통 습속을 반영한 기호들도 곳곳에 있다. 관객이 이 그림들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얻는 과정이야말로 동네 다방과 평범한 가정집에서 이발소 그림이 담당해 온 역할이 아니었을까.

황하연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에서 제안된 삼각지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아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흐리고 주변과 타자를 다시 보는 시각으로까지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장 역시 이런 의도를 반영한다. 오래된 집의 처지 역시 삼각지 미술과 비슷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한옥과 양옥 양식이 혼합되어 왔으며 재개발 사업으로 해체되기 직전이라는 점에서다. <삼각지미술 예찬>전은 여러 모로 우리가 가까이 지녔던 것, 우리가 늘 기대어 왔지만 잊어 버렸고, 현대의 속도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는 21일까지 열린다. 02-766-7660

  • 최석운, '동백꽃 돼지', 2010
  • 황지윤, '안개의 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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