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1960~80년대 한국의 소비재 45점… 시카고ㆍLA 순회 전시도

금성 VD-191 텔레비전
'강철은 부서져도 고무신은 찢어지지 않는다.' 1920~30년대 광고 포스터에 적힌 과장된 카피는 고무신의 실용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1922년, 일제 강점기 시작 무렵 한국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은 한때 닳지 않는 실용성 덕에 서민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신발 중 하나였다.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의 고무신은 지금처럼 유선형의 매끈하고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다. 발등을 감싸며, 폭은 좁고 굽이 높은 구두의 형태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한국식으로 바뀐 고무신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폭이 넉넉해 큰 발도 너끈히 들어가고 발등을 덮지 않아 신고 벗기 편하며, 굽이 거의 없는 형태를 지녔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지만 이 고무신은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디자인을 인정받아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품목 중 하나로 선정됐다.

최근 몇 년 새, 한국에는 전에 없던 디자인 바람이 불었다. 대규모 행사가 열리고, 해외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방문했지만 정작 우리의 디자인은 없었다. 서구 중심의 디자인 역사에서 한국 디자인 연구 결과는 한없이 비약해 소위 '디자인 클래식' 반열에는 아무런 결과물도 내놓지 못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실천적 연구가 2008년부터 3년에 걸쳐 진행된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서 한국디자인문화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시작해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이어서 추진해왔다.

뉴욕에서 전시 중인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전시 광경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전문위원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매년 50개 품목의 한국적 디자인 유산을 발굴해왔다. 미적, 실용적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며 오랜 시간 한국인들의 일상과 정서를 깊숙이 파고든 수많은 물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반복적으로 선정된 물건도 있다.

선정된 물품 중 고무신을 포함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시대상을 간직한 디자인 유산이 뉴욕에 모였다. 45점의 디자인 유산은 이달 7일부터 뉴욕에 자리한 '코리아 소사이어티 갤러리'에서 오는 6월 3일까지, 약 두 달간 뉴욕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전의 부제는 '행복을 파는 1960년대~80년대 한국의 소비재 디자인'으로, 디자인 콘텐츠뿐 아니라 당시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 자료들이 함께 전시돼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전시에는 재미있는 물품이 등장했다. 60년대에는 고무신을 비롯해, 빨간 돼지 저금통, 모나미 153볼펜, 이태리 타월,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일상의 물건에서 , 마포 아파트, 이순신 동상까지 다양하다.

그런가 하면 70년대에는 경부고속도로, 오리표 싱크대, 개량주택, 새마을기, 바나나맛 우유, 현대 포니, 커피믹스, 꽃무늬 가전, 철가방 등이 전시관을 차지했다. 80년대에는 마이마이 카세트, 88올림픽 스타디움, 호돌이, 안상수체, 아래아 한글, 행복이 가득한 집, 쏘나타, 종갓집 김치 등이다.

이들 소비재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표주박 바가지가 플라스틱 바가지로 대체되는 60년대는 산업화의 시대로, 아파트의 등장과 함께 주거 공간의 변화도 생겨났다. 이때 등장했던 이태리 타월은 한국인이 만들어 지금까지도 애용되는 발명품이다. 묵은 각질을 벗겨 내고 온몸을 마사지하는 효과를 가졌다고 해서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까지 한국의 목욕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한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산업화에 가속도가 붙었던 70년대는 꽃무늬 전자기기로 산업 디자인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 1976년, 커피믹스를 동서식품이 처음 시판했는데, 인스턴트 커피와 설탕, 프림을 일정한 비율로 섞은 포장 판매를 통해 개인의 취향마저도 하나로 통일하고 계량화시켰다. 커피 타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커피믹스는 프림과 설탕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는 포장의 등장 이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소비가 크게 증가해 여전히 커피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88올림픽이 개최된 80년대에는 향상된 생활 수준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아래아 한글과 안상수체 등의 한글의 디자인적 변신도 가능케 했다.

전시회를 기획한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최정심 원장은 "자동차, 전자기기 등 세계적으로 디자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이 시대 한국의 대표적 산업 디자인 제품들의 뿌리는 60년대 이후에 있다"면서 "순회 전시회를 통해 한국 디자인 문화의 새로운 가치와 중요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이번 전시의 의의와 기대를 전했다.

꽃무늬 가전 제품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전은 뉴욕 전시 이후, 내년 봄까지 시카고와 LA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