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일그러진 그라운드 제로의 교훈


뉴욕의 봄비는 심술궂었다. 밤 늦게까지 멀쩡한 하늘을 보면서 ‘ 아침에 일찍 나가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비를 뿌렸고,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저녁 약속을 잡으면 돌아오는 길엔 비를 만났다. 봄비는 9ㆍ11 뉴욕 테러 사건의 현장인 ‘ 그라운드 제로’에 들른 날도 추적추적 땅을 적셨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2차대전 때 일본의 핵폭탄 피폭 지점을 방불케 하는 ‘그라운드 제로’앞에 서서 전율처럼 다가오는 인간의 잔혹성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알 케에다가 납치한 여객기가 쌍둥이 빌딩을 파고 드는 순간, 맨해튼에서 한국의 관광단을 인솔 중이었다는 가이드 김모씨의 자랑 섞인 목격담에 TV에서 본 그 장면을 떠올리며 고소(苦笑)했다. 더 이상의 새로운 감흥은 없었다. 누군가 충돌 장면을 비디오로 찍지 않았더라면(테러를 미리 귀띔 받은 유대인이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라운드 제로의 울타리에 걸려 있는 당시 사진이 없다면 벌써 사건은 ‘ 테러의 추억’으로만 남았을 터였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가슴에 애국심을 지피지도 못하고,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때리기가 그렇게 쉽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벗어나면, 미 국민을 열광시켰던 이라크전도 이제 미국에게 치욕과 좌절을 안겨주는 ‘ 애물단지’로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일주일 가까이 TV 화면을 점령한 몇 장의 사진은 이라크가 미국에 덧씌운 굴레를 보여 주는 듯하다. 사진 속의 앳된 여군은 발가벗긴 이라크 남자를 뒤에 두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 기분 최고’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도 모자라, 목에 줄을 매달아 개처럼 끌고 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담배를 입에 문 채 총을 쏘는 포즈를 취하고…. “ 대학에서 스톰체이서(Stormchaser : 태풍 추적 전문가)가 되려고 했다”는 여군 일등병 린디 잉글랜드도 따지고 보면 가혹한 이라크전의 희생물이다. 사진이 공개된 뒤 린디가 받은 고통은 전쟁이 인간에게 가르쳐 준 가학성 앞에 그녀의 이성이 무릎을 꿇은 죄의 대가치고는 큰 편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이라크전에 참전하기 전에 이슬람 교도들이 공공장소에서 신체를 드러내는 것은 알라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배웠을 터인데, 그걸 철저하게 짓밟았으니 말이다. 아프간의 무너진 탈레반 정권은 “ 다리를 절대로 드러내지 말라. 알라신께서 내려다 보고 있다”며 1998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선수 40명에게 긴 바지 착용 지시를 내렸다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을 강제로 옷 벗기고 성적으로 희롱까지 했으니 그라운드 제로의 교훈은 일찌감치 일그러져 버렸다.

린디가 전쟁의 희생자라면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미 행정부다. 부시 대통령이 사건 발생 엿새만에 사과하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이라크 수감자들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당연한 후속 절차다. 하지만 그 정도로 덮을 수는 없다. “ 미국을 위해, 미국 군대의 안전을 위해, 전세계에서 우리의 이미지를 위해 럼스펠드가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톰 하킨(민주) 상원의원의 주장에 따라 옷을 벗어야 할 사람은 벗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적 가치의 우월성과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다.

전장에서 날아온 사진 몇 장의 폭발력은 실로 대단하다. 1960년대 베트남전의 참혹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국민에게 전달해 반전 운동을 촉발했던 비디오카메라가 초창기에 그랬을 것 같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모두 디카로 찍은 것이라니 바야흐로 디카가 비디오 카메라 자리를 물려받은 셈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인간의 잔혹성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그 흐름을 제어하는 자리에 첨단 과학의 산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연의 섭리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우리가 미군의 포로 학대에 관심을 쏟는 것은 우리 군의 파병이 눈앞에 다가 왔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파병 지역을 확정할 방침이나, 갑작스런 포로 성고문 사건으로 멈칫거리는 느낌이다. 미국의 이라크전은 테러 행위와 거의 다를 바 없는 ‘ 더러운 전쟁’으로 낙인 찍히고 말아, 파병해야 하는 정부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이 때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 곳은 집권 여당이다. 4ㆍ15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만큼 열린우리당은 정책을 주도할 만한 힘을 갖췄다. 집권 여당의 국정운영 능력을 발휘해 볼 기회이기도 하다.

때마침 주간한국과 회견을 가진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원은 이라크 상황에 변화가 생겼으니 파병 문제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적절하고 바람직한 방향 설정으로 본다. 파병 결의를 뒤집는 데 대한 부담도 적지 않지만, 스페인 등 파병 국가들이 ?祈?철수하고, 갈수록 약해지는 이라크전 명분을 감안하면 구태여 기존 결의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유연한 대처가 우리의 국익을 위하고, 비에 젖은 그라운드 제로의 교훈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에서>

이진희 부장


입력시간 : 2004-05-13 16:09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