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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클린턴의 영욕에서 배워라


한 남자가 두 개의 문 앞에서 어느 문으로 들어갈지 망설이고 있었다. 첫번째 문에는 ‘들어가면 저주받을 것이다’, 두번째 문에는 ‘안 들어가면 저주받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는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에서 남편이 화이트워터 부동산 스캔에 대해 특별 검사를 인정할 지 여부를 놓고 참모들과 토론할 때 백악관 분위기를 그렇게 전했다. 94년 1월 11일 밤, 클린턴은 여야 정치권의 특별검사 임명 요구를 받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다. 화이트워터 스캔들은 이미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클린턴 부부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화이트워터 스캔들은 클린턴 부부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다. 22일 시판된 클린턴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클린턴은 대통령으로서 저지른 최대 실수가 바로 재닛 리노 법무장관에게 화이트워터 스캔들 특별검사를 임명하도록 요청한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치적 문제를 좀더 빨리 해결하기 위한 클린턴식의 응급 처치가 그후 7년 가까이 정권의 힘을 약화시켰고, 국가 전체로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활을 부당하게 침해했다’(‘살아 있는 역사’ 중에서)는 게 사실이다. 또 그것은 미국 형사 사법 체계의 정치화와 정치 체제의 범죄화를 불렀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클린턴으로서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대통령의 결정은 아무리 사적인 것이라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또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특별검사 임명 요청은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로 이어져 클린턴은 결국 탄핵법정으로까지 가는 곤욕을 치뤄야 했다.

선거 개입 사과 거부 기자회견으로 탄핵정국을 부른 노무현 대통령도 그 동안 정책 결정이나 발언에 신중하지 못한 면이 적지 않았다. 최근 논란을 부른 신행정 수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18일 기자 간담회에서 국민투표 실시 여부를 국회로 떠넘겼다. 국민투표 공약은 사실이지만 국회에서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통과됨에 따라 그 공약은 종결됐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인데, 이는 전형적인 ‘조삼모사(朝三暮四)’식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인 지난 2월24일 방송기자클럽 회견에서 “… 큰 찬반의 논란이 있고 싸움이 있으면 이후라도 국민투표 같은 것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약 넉달 전과 달라진 것은 6ㆍ15 총선 이후 크게 바뀐 국회 지형밖에 없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거대 여당이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은 곧 열린우리당에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결정을 확정해 달라는 압력이나 다름없다. 소수당 시절 걸핏하면 국민의 뜻을 직접 묻자던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

국민투표 결정을 국회에 미루는 것은 대통령의 책임 회피에 해당한다. 헌법 72조는 국민투표 실시 여부를 대통령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욱이 수도 이전에 대한 크고 작은 결정은 앞으로 두고두고 노 대통령의 업적, 혹은 과오로 연결될 것이다.

수도 이전 논쟁이 국가적으로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두고 봐야겠지만, 수도 이전 이슈를 선점한 노 대통령은 이미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얻었고, 차기 대선에서도 충청권 공략 카드로 ‘재미’를 볼 것이다. 정치 지형으로 살피건대, 한나라당이 아무리 개혁의 옷으로 갈아입고, 영남지역을 석권하더라도, 호남과 충청권을 합친 소위 ‘DJP’ 표심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TK의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것도, DJ가 정권교체를 이뤄냈던 것도 결국은 영호남의 캐스팅 보트인 충청권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정부가 차기 대선 때까지 어떤 형태로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이니시어티브를 놓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 가능하다.

대검 중수부 폐지 여부에 대한 노 대통령의 결정도 주목거리다. 중수부의 수사 기능은 ‘검찰청법’에 명시된 게 아니라 ‘검찰청 사무 기구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규정돼 있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중수부의 수사 기능은 폐지된다. 송광수 검찰총장이 엊그제 “중수부 폐지는 지난 1년간의 대선자금 수사에 불만을 품은 측이 검찰의 힘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며 강하게 반발한 것은 대통령의 책임 있는 결정을 촉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수부 폐지는 노 대통령 탄핵의 빌미가 됐던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으로 불거졌지만, 국민은 노 대통령이 집권 초기 평검사와의 대화 때 검찰의 독자적 수사 기능을 보장하겠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 중수부 폐지=검찰 수사 기능 제한’이라는 국민 여론이 존재하는 한 중수부 폐지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노 대통령에겐 지금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최고의 결정, 검사와의 대화가 최대의 실책으로 여겨질 듯하다. 하지만 퇴임 후에도 그럴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던 새만금 사업이 지금껏 난리를 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최고의 결정이 최대의 과오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4-06-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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