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아우슈비츠와 존 톨랜드


60년 전인 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제1우크라이나사단 1군 소속 여자 통신병 유리아 포즈다야코파는 히틀러 제국의 제일 큰 죽음 캠프인 아우슈비츠를 보고 놀란다. 해골과 같은 모습의 생존자 7,600여 명에게서 풍겨 오는 죽음의 악취. 어린 아이들의 신발이 산더미를 이루고 사람의 머리털은 뭉쳐져 언덕을 이뤘다. 수용소 사무실에 쌓인 파일과 서류 더미를 보며 이 소녀 병사는 “어떻게 이런 것을 남겨 놓을 수 있을까”하고 놀랐다. 남자 옷만 34만8,000여 벌. 여자 코트 등 의류는 83만6,000여 벌이 넘었다.

포즈다야코파는 2001년 영국의 역사 작가 막스 해스팅과의 인터뷰에서 놀라움을 지우지 못 하고 말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만지는 것은 죄가 된다고 느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혼이 우리(수용자들을 도우려 온 적군의 의사와 병사들)를 에워 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후 여려 주일 동안 구운 쇠고기 냄새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숙소에 돌아 오면 죽음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박박 몸을 닦아 내야 했습니다.” (2004년 12월에 나온 막스 해스팅스의 ‘아마겟돈 - 1944-45 독일 전투’에서)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63년 4월. 극작가가 되려다가 논픽션 작가의 길을 선택한 존 톨랜드는 ‘마지막 1백일(1945년 1월~5월)’의 독일 및 유럽 전쟁 자료를 모으기 위한 여행에 나섰다.

1963년 말 만해도 아직 폴란드는 철의 장막 안쪽에 있었다. 서방 작가에게는 별다른 세계였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아우슈비츠. 중서부 미국의 대학 캠퍼스처럼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빌딩 속에서 본 의치, 자질구레한 장신구, 구두, 의류 더미, 학살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유품들이 대학 캠퍼스와 같은 평화스런 환상에서 깨어 나게 했다. 구역질이 났다.

톨랜드는 이 곳에서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 곳과 다른 캠프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완벽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써야겠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캠프 여러 곳을 살피며 그는 마음을 달랬다.

톨랜드는 아우슈비츠를 해방한 적군이 베를린을 향한 45년 1월 27일부터, 항복을 받아낸 5월 7일까지의 얘기를 담은 ‘마지막 1백일’을 1965년에 출간했다. 이 책은 미ㆍ영 연합군이 서부 유럽에서 독일군과 소비에트 적군이 동부 유럽에서 독일군과 벌이는 전투에 중점을 두었다.

톨랜드에게는 1963년에 본 아우슈비츠의 음침한 환영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유럽에서 6백만 명,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해된 최소 1백만 명의 유태인에 대해 그 살해 원인을 밝혀 내야만 한다는, ‘역사를 쓰는’ ‘역사에 사로잡힌’ 작가의 의무감이 그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

톨랜드는 1971년에 그 근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소위 ‘파이널 솔루션(Final Solutionㆍ최종 해결)’로 명명된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누가 구상했으며, 이의 ‘최종 책임자’는 누구였냐는 것이었다. 톨랜드는 1961년에 나온 ‘히틀러의 비밀스러운 책’을 읽고 앞으로 써야 할 책의 이름을 얻어 냈다. 1975년에 나온 ‘아돌프 히틀러’가 그것이었다.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인 과정을 써서 1970년에 냈던 ‘떠오르는 태양:1936-45년 일본제국의 몰락’으로 1971년 이미 퓰리처 역사 부문 저작상을 수상한 톨랜드. 1912년생인 그는 85세에 ‘역사에 사로잡혀 – 한 사람의 소란한 세기에 대한 비전’이란 회고록을 썼다. 2004년 1월 4일에 사망한 그에게 이 책은 마지막으로 쓴 역사서가 됐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1963년 아우슈비츠에서 찾기 시작한 ‘최종 해결’은 ‘히틀러 두뇌의 생산물’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히틀러는 ‘히틀러의 비밀스러운 책’에서 ‘최종 해결’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인민들간의 투쟁이다. … 생(生) 자체가 죽음에 대한 싸움인 것처럼.” 그래서 독일에게는 동 유럽이란 생존터(Lebensraum)가 필요하고, 같은 혈족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독일 피가 유대의 피로 오염되어 있다.”“만약 독일이 살아갈 터를 찾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다. 유대인의 위협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존터’를 위한 투쟁도 없다. 순수한 피가 없다면 나라는 썩는다. 동쪽에 생존터를 찾고 유대인을 파괴해야 한다.”

톨랜드는 이 같은 히틀러의 주장이 ‘나의 투쟁’에서는 완곡하게 씌여 있지만, ‘비밀스러운 책’에는 철학처럼 박혀있다고 분석했다. 그가 쓴 ‘아돌프 히틀러’ 1,035쪽 곳곳에 ‘최종 해결’에 관한 히틀러의 집요함과 편협이 적혀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남짓한 2004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에는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의 정상이 60년 전의 해방을 기렸다.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은 “최근 다시 반유대주의가 부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유럽인들이 그들의 양심에서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지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정상들이 식장에 정장을 하고 있는데 비해 체니 미국 부통령은 스키모에 올리브색 파카, 장화 차림으로 이 해방식에 참석해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식장에 오기 전 한 포럼에서 강조했다. “우리는 여기에 모여 엄청난 잔혹 행위가 비문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유럽 문명의 한 복판에서 이뤄진 것을 되새겨야 한다. 죽음의 캠프는 교양 있고 예절 바른 고상한 인격자들에 의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양심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아우슈비츠는 악마가 엄존하며, 악마라고 불러야 하고 그들과 맞서야 함을 일깨워 준다”고 했다.

톨랜드가 살아 있다면 체니의 발언에 대해 무어라 했을까. 히틀러는 ‘교양 있는 악마’라고 했을까. 또 그를 도운 나치의 독일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세상을 떠난 그의 명복을 뒤늦게 빈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2-17 13:19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