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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21일 평양에 온 중국공산당 왕자루이 대외 연락부장을 만났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6자회담 조건이 성숙된다면 어느 때든지 회담탁(회담테이불)에 나갈 것” 이라며 “미국이 믿을만한 성의를 보이고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0일 북한 외무성이 6자 회담 무기한 불참을 발표하면서“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이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밝힌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 ‘핵무기고’ 라는 세 묶음의 북한의 말들이 해방정국(1945~48년) 때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라는 의문을 2월10일자 성명을 보며 가졌다.

이에 대한 해답을 두 곳에서 얻을 수 있었다. 올해 86세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양호민 한림대 석좌교수가 쓴 한국 현대사 강좌 첫 권인 ‘38선에서 휴전선으로’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올해 42세인 레닌그라드 동방학부에서 역사 박사학위를 받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서울 국민대학 및 호주 국립대 교수)가 쓴 ‘스탈린에서 김일성까지-북한의 형성 1945-60년 (2002년 6월 미국에 나옴)’에서 이다.

그 자신 평양 출신이며 일본 중앙대를 거쳐 광복 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양 석좌교수는 ‘21세기 새로운 세대의 역사 인식을 위해 새로 쓴 한국 현대사 길잡이’ 라는 한국 현대사 강좌(5권) 편찬 대표를 맡았다. 그의 책 ‘38선에서…’는 80세 넘긴 필력의 위대함과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책에는 곳곳에 북한의 지도층이 소련 군정아래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생소한 말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지가 나타나 있다. 해방정국에 등장한 새로운 말은 ‘민주주의’, ‘자유’ 였고, ‘공산주의’, ‘신탁’, ‘자주’, ‘독립’, ‘민족’도 있었다. 양 교수는 이런 말의 홍수는 독단적 해석으로 해석의 정치화ㆍ 정권화를 이뤘고 드디어 미국과 소련에 그 해석을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쓰고 있다.

제2차 미ㆍ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는 1949년 5월18일과 19일 이승만과 반탁 지도자들은 미국 대표인 알버트 브라운 소장에게‘민주주의’와 ‘신탁’이란 용어의 정의를 내려 달라는고 요청 했다. 반탁 거두인 이승만은 미 국무성에도 요청했다. “모든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신탁 통치’라는 말 대신 ‘원조’라는 말을 사용 할 것과 ‘민주주의’라는 말은 미국과 소련에서 의미가 다르므로 미ㆍ소는 합의된 정의를 조선인에 제시 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또 한명의 반탁 거두 였던 김구도 미ㆍ소 공동위원회에 이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다.

반탁 지도자들이 바라는 것은 “조선에 수립될 민주주의 정부는 미국의 용어 해석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 민주주의가 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좌파의 민족통일 전선은 제2차 공위가 이뤄진 것 자체가 “인민과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모스크바 결정(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ㆍ영ㆍ소 외상회의에서 논의한 5년 신탁통치안) 절대 지지를 주장했다.

제2차 공위는 5월 21일에서 9월 17일까지 모두 37차례 열렸지만 통일한국을 위한 임시정부 설치방안은 참가정당의 찬탁여부에 따른 대상설정 토의에 머물며 끝났다. 결국 해방정국은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 수립을 향한 길로 나가게 되었다.

란코프 교수는 동방학부로 유명한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1989년 역사학 박사를 따기 전에 84~85년에 평양에 유학했다. 그는 1945년 8월 소련 점령 하에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독재자가 되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북한과 관계했던 20여명을 인터뷰 했다. 그의 연구는 김일성은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스탈린 국가주의자’로 50년간 북한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란코프는 그의 책에서 북한에서의 소련군정의 핵심 이었던 테렌티 슈티코프 중장(초대 북한대사)과 니콜라이 레베제프 소장(2대 북한대사)이 ‘인민’,‘민주주의’,‘자유’의 용어 사용에 고심한 점을 여러 곳에서 표현 했다.

박헌영과 김일성이 1946년 7월 비밀리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일이다. 스탈린은 두 사람에게 조선에서 난립한 좌익 정당들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인민들에게 상의를 해 보아야 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이나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되받았다.

스탈린은 조선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1948년 4월 24일 평양에?헌법을 만들기 위한 최고 인민회의, 남북 연석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한창일 때 스탈린은 소군정 민정책임자 슈티코프를 모로토프 외상과 함께 그의 별장으로 불렀다. 그리고 스탈린은“평양에서 이뤄지고 있는 남ㆍ북 회담은 잘된 것이다. 북한의 ‘임시’헌법에서‘임시’란 단어를 빼라. 헌법 2조에서 정의된 권력은 당과 인민에 있다고 바꿔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스탈린은 또“신앙의 자유 조항은 그대로 두고 토지 상한은 5~20헥타르를 넘지 않도록 하라”고 까지 명령했다.

1948년 9월 8일 건국 전야에 레베제프 소장은 북한이 국호를 인민공화국으로 하려하자 이에 대해 “인민공화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란코프 교수는 스탈린과 소군정의 핵심은 인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자유는 새로이 구축되는 체제는 지지할 수 있지만 ‘반대 할 수 없는 자유’임을 북한의 지도부에 교시했다고 분석한다.

양 석좌교수는 1950년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승리는 조국의 통일과 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한 투쟁에 총궐기한 조선인민 편에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이 6ㆍ25의 전주곡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는 남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김일성의 필요충분 조건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2월 10일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핵무기’ 늘리기”가 제발 전쟁으로는 가지 말아야 한다. 김일성, 정일 부자의 이름이 민족의 파괴자로 역사에 함께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김씨 왕조는 2대에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5-03-0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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