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국인ㆍ일본인(5)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오늘날의 일본인이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혼혈의 결과이고,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이동해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야요이인을 현재의 한국인과 곧바로 연결시켜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밀접한 관계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상당한 관계가 있음을 완전히 부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한국인’의 범주에 따라 다르다. ‘한국인’은 넓은 의미로는 한민족과 거의 비슷하게 쓰인다. 북한 주민은 물론 중국의 조선족 동포, 미국이나 일본의 동포, 구 소련 지역의 ‘고려인’ 등을 포괄한다. 어찌 보면 구한말 조선 땅에 살았던 ‘조선인’의 후예가 모두 한국인인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조선인’끼리의 결혼이 아닌 현지인과의 혼혈의 결과 태어나 현지 국적까지 가진 사람을 선뜻 ‘한국인’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이럴 때는 혈통에 한국적 요소를 가리키는 ‘한국계’란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반면 아주 좁은 의미의 ‘한국인’은 중국 동포나 재일동포는 물론 북한 주민까지 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사람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국민’과 거의 같은 뜻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한국인’이란 말은 사람과 시간, 장소에 따라 아주 좁은 데서 아주 넓은 데까지 대단히 유동적인 뜻으로 쓰인다.

한국인을 넓은 뜻으로 한민족과 동의어로 보더라도 혼란이 다 사라지진 않는다. ‘한민족’의 개념 또한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애매모호하다.

현재 지구상의 인류를 이런 저런 민족으로 가를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기란 정말 어렵다. 흔히 ‘다민족 국가 미국’이라고 하면 머리 속에 우선 백인과 흑인, 황인종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때의 ‘인종’조차 순수한 형질 인류학적 특징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계층이나 문화 등 사회ㆍ역사적 속성을 포함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인종이 다르다’는 말은 피부나 머리카락, 눈동자 색깔의 차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출신 집안 등 사회적 배경의 차이를 말할 때도 있다. 이런 ‘사회적 인종’의 개념은 과거 ‘민족’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도 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구미에 범람한, 백인은 황인종이나 흑인보다 우수하다는 식의 인종론은 생물학적, 문화적 특징으로 인류를 갈랐다. 인종주의(Racism)나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의 ‘인종’에 늘 깔보는 듯한 어감이 남아있는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다.

이를 피하는 보다 가치중립적인 말인 ‘아시아인’(Asian)과 ‘아프리카인’(African)이 각각 ‘황인종’과 ‘흑인’을 대체하게 됐다. 이에 따라 ‘인종’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생물학적 의미에 한정해 쓰는 예가 늘었다. 이때의 ‘인종’이나 그 가지인 ‘종족’이 보여주는 혈연적 친근감이 ‘민족’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대로 겹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종족’도 역사ㆍ문화적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민족’으로 나뉘거나, 다른 ‘종족’과 그 혼혈집단이 하나의 ‘민족’을 이루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문화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언어는 ‘민족’을 생각할 때 인종보다는 알기 쉬운 기준이 될 법하다. 그러나 언어를 계통별로 묶은 ‘어족’(語族)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 또한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해외 교포를 여전히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여기는 현실과도 동떨어져 있다.

다른 문화 요소인 종교도 때로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중국의 회족(回族)이나 유고의 이슬람교도 등은 이슬람교를 기준으로 주위의 다른 민족과 자신들을 나누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많은 민족분쟁이 종교분쟁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 다양한 종교를 포섭하고 있거나, 다양한 민족이 같은 종교를 가진 경우도 많다. 따라서 종교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가르는 적절한 기준이 되긴 어렵다.

‘민족’을 생각할 때 생물학적 특성이나 언어, 종교 등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객관적 요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주관적 요소다. ‘우리’라는 의식 자체가 ‘남’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듯 역사적 경험과 그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민족’ 의식 형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경우 민족은 ‘역사 공동체’와 다름없다. 이런 시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민족이란 결국 스스로가 역사적으로 그 민족의 일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동어반복적 정의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역사 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 자체가 특정 시기에 시작된 역사 해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에 따른 민족 개념의 혼란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에나 ‘민족’또는 ‘우리’ 의식이 싹튼 서구에 비해 통일신라시대부터 일찌감치 국민국가 비슷한 형태를 띠어 온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사람들의 집합, 독자적 풍속과 문화를 공유한 집단을 가리키는 ‘에트노스’(Ethnos)를 국민국가의 ‘민족’(Nation)과 나누어 보는 논의가 활발하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수한 환경이 아닌 한 ‘에트노스’조차도 100% 순도는 아니고, 외부와의 접촉을 경험하지 않은 그런 집단의 존재를 문명 사회에서 상정하긴 어렵다. 흔히 ‘에트노스’로서의 한민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오늘날 우리의 ‘한민족’ 의식은 직접적으로는 19세기말 외세 침탈의 결과다. 당시의 외세 침탈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 이후, 즉 열강에 이미 민족 개념이 정착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 의식도 ‘민족’을 기본단위로 했다. 그것이 일제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에 앞서 한반도에 일찍이 ‘에트노스’ 의식, 중국이나 일본 등과 조선을 가르는 ‘우리’ 의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우리’ 의식은 오늘날의 ‘한민족’과 그리 잘 일치하지 않는다. 어렴풋이 이웃 다른 나라의 신민(臣民)과 구별하는 ‘우리’ 의식이 있긴 했지만 전혀 다른 각도의 ‘우리’ 의식이 있었고 둘 중의 어느 쪽이 우세했을 까는 단정하기 어렵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일본이나 청나라 군사에 대한 저항 의식은 있었지만 그 중심 요소가 ‘다른 민족’에 대한 저항인지, 생활 조건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는지는 애매모호하다. 임진왜란 당시 지역이나 주민의 신분적 구성에 따라 왜군에 대한 태도는 크게 달랐다는 실증적 증거들이 있다. 더욱이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신분적 장벽 때문에 외부에 대한 ‘우리’ 의식 못지않은 내부적 ‘우리’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많다.

또한 대내적 ‘우리’ 의식을 죽이고 대외적 ‘우리’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일련의 의식 조작은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강조된 고조선 건국 설화에서부터 일찌감치 시작됐다. 그런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한말에 와서야 진정한 ‘한민족’ 의식이 정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가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민족’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일본 청동기 문화를 열고, 오늘날 일본인 절반의 조상인 야요이인들이 한국인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한민족’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혈연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모든 집단을 ‘한민족’의 일원으로 볼 때는 당연히 한국인이고, 직접적이고 중심적인 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한정할 때는 한국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들이 한국인이든 아니든 오늘날의 한국인을 형성하는 역사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부분을 떠맡았으며, 그 때문에 결코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4-21 15:59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