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4)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예(濊)ㆍ맥(貊)과 융합해 한민족의 원류를 이룬 한(韓)에 대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는 이렇게 적었다.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써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해 사방이 가히 4,000리다. 세 종족이 있어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옛날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 나라의 쇠퇴로 연(燕)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고,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들자 역시 스스로 칭왕(稱王)하여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를 받들려 했다.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도 망명하여 호복(胡服) 차림으로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왕(準王)에게 가서 항복하고 서쪽 국경 지방에서 살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屛)으로 삼자고 설득했다.

준왕이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홀을 주며 땅 100리를 봉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漢) 나라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오고 있다고 거짓으로 알리고, 들어가 숙위(宿衛)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결국 준왕을 공격했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했다. 그 후손은 아주 멸망하였으나 지금도 한인(韓人) 가운데는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한 사회가 일어난 시기는 아직까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위의 삼국지 기사로 보아 기자조선의 준왕이 남천한 기원전 194년 이전에는 성립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이라는 명칭은 신라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干)이나 한ㆍ칸(Khan)과 통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간(干)이 애초에 Khan의 소리를 한자를 빌려 표현한 것일 수도 있어 모두 부족장이나 통치자를 가리키는 몽골어와 통하는 말이다. 그럴 경우 ‘한’은 처음에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존재를 뜻했고, 나중에는 그런 통치자가 다스리는 지역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한’을 소리로 보는 대신 뜻이나 성(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진(晋) 나라가 멸망한 후 그 후예로서 일어난 삼진(三晋)의 나라, 즉 한(韓)ㆍ조(趙)ㆍ위(衛) 가운데 현재의 샨시(陝西)성 한청(韓城) 지역에서 일어난 한의 유민이나 후예와의 연관성을 상정하는 시각이다. 두 시각은 크게 다른 듯하지만 한의 지배층이 북방계 민족에서 유래했을 것이란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이는 마한에 대한 삼국지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그것을 소도(蘇塗)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하여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한다.’

기원전 2세기 무렵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으로 나뉘어 발전하는 가운데 그 중심적 지위를 누렸던 마한의 풍습은 오늘날 몽골과 시베리아 남부에 전해지는 북방계 무속신앙이나 천신숭배 사상, 그와 같은 계통인 동이족 전래의 숭조(崇鳥)신앙, 현재까지도 흔적이 남은 솟대 신앙 등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결국 한은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일찍이 형성된 토착사회에 북방으로부터 순차적으로 밀려들어온 유이민이 여러 번 겹쳐지면서 발전한 셈이다.

이들이 마한 변한 진한으로 나뉘었다고 해서 서로 경계를 뚜렷이 한 채 정립(鼎立) 상태를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다. 3한 사이는 물론 3한 각각의 내부에서도 명백한 통일체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삼국지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이란 기록이 보이고, ‘변진(弁辰)과 진한(辰韓)은 모두 24국인데 대국은 4,000~5,000호, 소국은 600~700호로 모두 4만~5만호다. 그 가운데 12국은 진왕(辰王)에게 복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며 진왕 스스로 서서 왕이 되지 못한다.’고도 적었다.

반면 ‘후한서 동이열전’(後對?東以列傳)은 이렇게 적었다. ‘(3한 78국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다.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땅을 합하면 사방 4,000여 리이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와 접하니 모두 옛날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나라가 마한 사람을 진왕으로 삼으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해 전체 삼한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 여러 나라 왕의 선대(先代)는 모두 마한 사람이다.’

두 기록을 비교하면 마한 출신이 진왕이 된다는 것은 같으나 그 통치 영역이 3한 전체와 진한으로 다르다. 이는 ‘3한에 앞서 진국이 있었고, 3한 성립 초기에는 가장 강성했던 마한의 중심세력이 진왕이 되어 진국을 이은 3한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심력이 떨어지고, 마한 지배층의 중심세력이 분열된 결과 진한에 대한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상황으로 변했다.’는 짐작을 낳는다.

그 문화적 배경은 청동기 제작과 공급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중국 것과 성분이 달라 자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제련시설의 흔적 등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청동기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특정지역에서 독점적으로 제작돼 공급됐음을 뜻한다. 3한의 세력분포로 보아 역시 마한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그러나 철기 문화가 일어난 이후 대량으로 철제무기가 생산되면서 그런 독점적 지위는 깨졌다. 이런 변화는 북방에서 잇따라 흘러 들어온 유이민에 의한 세력 재편과 겹쳐졌다.

3한은 무엇을 기준으로 갈라진 것일까. 실마리는 삼국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옛날에 진(秦)나라의 부역을 피해 한(韓) 나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노인들은 대대로 전해 왔다. 성책(城柵)이 있다. 그 언어는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 활(弓)을 호(弧), 도적(賊)을 구(寇), 술잔 돌리기(行酒)를 행상(行觴)이라고 한다. 서로를 불러 도(徒)라고 하니 진(秦)나라 사람과 흡사한 바가 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고 부르는데 동방 사람들은 본디 나(我)를 아(阿)라고 하니 낙랑인들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 6국이 있었는데 차츰 나뉘어 12국이 되었다.’

이 기록에서 마한과 진한의 말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차이가 단순한 방언 정도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여기에 나타난 한자의 차이는 마한과 진한의 고유어를 중국인이 한자로 옮긴 것이어서 그 원형을 추정하긴 어렵지만 전혀 다른 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차이는 3한 지배층의 언어 사이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기층 민중 사이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전자 쪽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기층 민중이 삼국지 저술에 자료를 제공한 중국인과 의사소통 수단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마한 지역에만 54개국이 있었을 정도로 소규모 집단이 병립해 있었을 때 느슨하게나마 이들을 묶을 수 있었던 것은 기층 민중의 동질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맨 처음 ‘변한’을 3한의 하나로 소개하고는 그 뒤에는 ‘변진’(弁辰)이란 표현으로 바꾸었다. 마한, 진한, 변진의 차례로 소개하고 있어 변한과 진한을 합쳐 부른 것도 아니다. 또 ‘변진에서는 철이 생산돼 한(韓)ㆍ예(濊)ㆍ왜(倭)가 모두 사간다’고 변진을 한(韓)과 분리했다. 적지 않은 궁금증이 솟는다.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8-11 17:10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