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김종빈, 노무현, 영조의 '국민'


엉뚱한 연상을 해본다. 10월17일 사퇴한 김종빈 검찰총장, 이를 받아들인 노무현 대통령과 이씨 조선의 최장기 왕인 영조(1724~1776)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다.

김 전총장은 퇴임사에서 밝혔다. “부당한 수사지휘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검찰이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것은 검찰조직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보장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21일 법무부 업무보고에서 법무부, 특히 검찰이 나갈 방향에 대해 은유와 함축이 든 말을 쏟아냈다.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령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정치적 요령 하나를 제안해 보겠습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검찰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국민들이 의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죠. 제일 어려운 것이 저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득권이고 하나는 습관입니다.”

노 대통령이 검찰에 바란 ‘국민들의 의심’, ‘국민들의 신뢰’는 6개월도 못되어 김 전총장에게는 ‘국민의 여망’, ‘국민이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약하는 것으로 변했다.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국민’이란 한 단어를 쓰면서 마음속 생각은 다른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다른 생각을 서로 조화시킬 생각이나 노력은 하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국민’이란 무엇인가. 지금부터 253년전인 1752년 1월27일 재위 28년째인 영조는 이번에 복원된 광통교에 나가 시냇가에 사는, 지금은 ‘국민’인 ‘백성’들에게 물었다. 세종 이래 300여년 간 준천(시내 파기)하지 않은 청계천에 대해 물어 봤다.

영조 : 나는 (준천)으로 민력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보건대,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는 파는 것이 더 급선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성 :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말이 다리 아래로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전에 일꾼을 동원 깨끗이 쳐내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막힌 것이 또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민심을 들은 영조는 광통교를 본 2년후인 1754년 3월 한양의 5부 노인 지도자 백성을 불러 조참(朝參 : 한달에 네 번씩 백관이 창덕궁 명정전에 나와 임금에 문안을 드리는 것)을 행하면서 청계천(그때는 개천(開川)) 준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백성들의 의견은 파는 것이 좋다에서 파는 것이 편리하지 않다는 등 엇갈렸다. 영조는 8년간을 내각, 백성 의견청취, 현장 답사 끝에 1760년 청계천을 준천했다. 1773년에는 석축을 쌓았다.

영조는 ‘준천사실(濬川史實)’을 지어 청계천 바닥 파내기, 석축 쌓기의 전 공정을 자세히 기록토록 했다. 그리고 그 서문을 직접 썼다.

“준천 역사(役事) 같은 일은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고(勞民), 또한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다(爲民). 나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였으니 무슨 마음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그래도 진신(높은 벼슬아치, 귀하고 어진사람)에게 묻고 많은 선비들에게 방책을 강구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에게까지 물었으나 몇 년 동안 미루어 오기만 했다. 지금에 이르러 고요히 생각해보니 그 시기를 그냥 넘겨서도 안되고 일을 지연해서도 안 될 것 같아 강제로 시행한다.”

‘영조의 준천을 통한 위민의 담론’이란 논문으로 청계천 복원 시민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인 조관권(서울시 교통연수과장, 문학평론가 조연현의 아들)씨는 한국학 대학원에서 2004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 박사는 올 3월 학위 논문과 청계천 복원 일들을 함께 엮어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라는 책을 냈다.

김종빈 전 검찰 총장, 노 대통령은 꼭 조광권 박사의 이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10-2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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