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역사를 내 나라, 남의 나라 입장에서 동ㆍ서양간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조그마한 실마리는 1960년생인 지식인 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대표 고미숙 교수(고려대 연구교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2003년 3월 나옴)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또 비교의 다른 쪽인 줄 저편에서는 1952년 태어난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가 옮긴 토머스 페인의 '상식, 인권'(2004년 12월 나옴)이 있다.

우연이기에는 너무 한쪽에만 시선이 쏠렸기 때문일까. ▲10월7일 영남대 박물관에서 개최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의 서거 200주년 추모 학술회 ▲10월13~23일 경기 남양주 다산 유적지에서 열린 연암, 그의 제자 초정 박제가('북학의'의 저자), 다산(정약용)을 기리는 '실학축전 2005' ▲경남 함양군 문화원이 이곳 안의면 현감을 지낸 연암을 기려 10월15일 벌인 '연암의 개혁사상' 학술대회 등 어느 곳에서도 박 교수가 '인간을 신뢰한 국제 혁명가'라는 칭호를 준 토머스 페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연암은 1737년 2월(음력) 서울에서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이의 손자로 태어났다. 페인은 1737년 1월 영국 노퍽주의 샛퍼트에서 태어났다. 코르셋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이 동과 서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점은 연암이 1805년, 페인이 1809년 죽기까지 우연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열하일기…'를 쓴 고 교수는 354쪽에 이르는 그의 사상, 문학, 글들을 정리하며 결론 내리고 있다.

숱한 이들을 위해 주옥 같은 묘지명을 썼던 그의 무덤에는 묘지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쓰기를 마치며 그에게 묘지명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고 쓰겠다고 했다.

'살았노라'의 의미는 조선의 근대가 시작되는 18세기 봉건제 속에서 인간, 자연을 찾아 이렇게도 웃기고 저렇게도 풍자한 그의 삶을 볼 때 '사람답게 살았다'는 뜻일 게다.

1780년 청나라 건융제의 70순 축하사절 일원으로 북경, 열하를 본 연암은 1783년에야 책을 마무리 한다. 고 교수는 이 책이 그의 '삶'의 전부임을 '썼노라'에서 새기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 주체문학 연구소 김하명 소장(1922년생)은 '열하일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적 제한성과 그 자신의 세계관(유고, 충군사상)의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애국주의와 나라를 좀먹는 양반 사대부에 대한 불타는 증오, 당대 봉건 사회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 뛰어난 사실주의적 일반화의 힘으로 하여 연암의 예술은 오랜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열하일기(1900년 봄에 나옴)는 우리 인민의 귀중한 유산으로 빛나고 있다."

페인이나 연암이 '살았노라'의 시대(1737~1805)에는 지금의 21세기 인간, 사회, 국가, 인권의 기틀이 선 미국혁명(1774~1784), 프랑스 혁명(1789~1799)이 있었다.

박홍규 교수는 이미 번역본이 두 권이나 나온 '상식', '인권 1ㆍ2부'를 새로 옮긴 이유를 썼다. "나는 모든 왕이 싫다.

동시에 양반이 싫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족보나 재실이 싫다." "지금까지 그토록 철저히 왕과 귀족을 부정하는 책(페인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

이렇듯 페인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왕들과 귀족들까지 부정하게 됐건만, 우리나라에서는 왕과 양반을 부정하는 역사책을 읽은 적이 없다.

도리어 여전히 왕과 양반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숭배되고 있다. 그리고 모두 다 왕족 또는 귀족이라는 양반의 후손임을 자처한다. 전 국민의 양반화, 그것이 민주화인가?"

페인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 1월에 익명으로 50쪽짜리 팜프렛 '상식'을 미국에 온 지 1년 만에 썼다.

1775년 4월에 매사추세츠의 렉신톤에서 영국군과 미 민병대가 싸운 후에 영국 왕정의 타도, 전제군주 귀족주의 나라를 없애고 민주, 대의,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미국시민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때 독립민병대 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톤은 이 책을 그의 대원이 읽도록 했다. 적어도 문자를 해독하는 미국 시민은 돌려가며 이 책을 읽었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등 역사 3부 작을 쓴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봅은 1961년 토마스 페인에 대해 평했다.

"그는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한 시대의 그런 무지개 빛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혁명은 인간을 재탄생시켰으며 지금의 시대(1774~1809)는 후세에 이성의 시대로 불릴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독립을 이루었고, 바스티유(프랑스의 교도소)는 무너졌다. 그때 그는 이 두 가지 경이로운 사건의 대변자로 활약했다."

"그는 마음 깊이 천성적으로 혁명적이었지만 실제적 정치적 슬로건은 기이하다 할 만큼 온건했다. 그의 목표였다. '전 세계적 평화의 문명화, 그리고 교역은 그때의 자본주들의 생각과 같았다."

"그의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들을 읽노라면 유쾌해지고 감동을 받게 된다. 우리가 여전히 인간을 신뢰한다면 어찌 지금이라도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좀 엉뚱한 제안을 해본다. 박홍규 교수는 페인의 동양 타자인 연암을 한번 연구해보는 것이 어떨까.

고미숙 소장은 연암의 타자인 서양의 페인을 고찰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인간이 살아야 하는 삶을 살기위해 쓴 것이 미래에도 피어나기 위해서는 교차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지난주 칼럼 ‘김종빈, 노무현, 영조의 국민’에서 ‘조관권(서울시 교통연수과장)’은 ‘조광권(서울시 교통연수원장)’의 잘못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박용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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