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 '늘근도둑 이야기' 한지승 '신의 아그네스' 연출박철수 감독은 마당놀이 '학생부군신위' 총지휘

얼마 전 국내에 선보인 발레 <홍등>은 영화감독이 만드는 춤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타 장르의 창작자가 보여주는 크로스오버의 시도는 기존 장르의 관객과 함께 새로운 관객층을 유치할 수 있는 동력원이 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영화와 연극의 교류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특히 현재 영화계를 좌우하고 있는 배우들의 뿌리는 대부분 대학로의 무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황정민, 김윤석 등 주연급 배우들을 비롯해 최종원, 명계남, 박광정, 권해효 등 개성파 배우들은 ‘연예인’으로 데뷔하는 요즘 연기자들과는 다른 ‘무대인’만의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로라는 인재양성소가 배출한 배우들이 그대로 오롯이 충무로에 안착하는 일방적 배급 형태의 고착이 그동안 대학로 침체의 한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 대학로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명품 연극들이 그동안 영화에 빼앗긴 명배우들을 다시 불러들여 침체에 빠진 연극계를 서서히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배우의 상호수급과는 달리 감독-연출의 교류는 그렇게 원활한 편은 아니었다. 스타감독인 장진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연극무대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는 연극인 출신이다. 이와 반대로 영화감독이 연극무대의 연출을 맡은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문인지 최근 연극계에 속속 나타나고 있는 영화감독들의 연극 연출은 그동안 ‘형’에게 일방적으로 받아오기만 했던 아우의 답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신랄한 사회 풍자, 세밀한 심리 묘사 등 장기 살려

‘연극열전 2, 조재현 프로그래머 되다!’의 두 번째 작품인 <늘근도둑 이야기>는 한 회도 빠짐없이 전석 매진되는 흥행을 이어가며 3차 앵콜 공연 중이다.

시사코미디 연극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1989년 초연 이후 오랫동안 ‘가장 재미있는 연극’, ‘다시 보고 싶은 연극’으로 꼽히는 연극이다. 권력을 조롱하는 풍자적 대사로 오랫동안 관객들의 웃음과 공감을 자아냈던 극작가 이상우의 텍스트는 2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 만큼 대사의 시의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연출의 역량이 발휘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목포는 항구다>, <화려한 휴가>를 찍었던 김지훈 감독은 비록 첫 연극 연출이지만 언어유희를 이용한 블랙 코미디로 김지훈식 ‘늘근도둑’을 만들어냈다.

1차 공연 때에는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삼성가의 미술품 구입 의혹 사건이나 신정아 게이트 등을 우회적으로 풍자하여 통쾌한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 공연 관계자는 특히 현 정부가 서서히 잡음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대운하 정책과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 등 정치·사회의 민감한 현안을 웃음으로 녹여내는 과감함을 보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그 말 그대로 “경찰청장님 오셨습니다. 물대포를 쏴주세요~!”와 같은 대사는 현장을 직접 체험했던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김지훈 감독은 초보 연출가로서 아직은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늘근도둑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도 관객으로서의 자신이 봤을 때 가장 행복했던 연극이기 때문이다.

충무로 생활도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배우를 잘 알지 못한다는 반성이 그를 연극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김 감독은 ‘늘근도둑’에 자신의 색을 덧입히려는 강박보다는 원작의 텍스트가 지닌 힘을 적절히 변용하며 시대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조력자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김지훈 감독의 전작들을 돌이켜보면 그가 재창조한 <늘근도둑 이야기>의 뼈있는 해학이 그저 뜬금없지만은 않다. <목포는 항구다>와 <화려한 휴가>에서 잇따라 호흡을 맞춘 박철민의 정신없는 ‘말발’과 연기는 그 자체로 무대에서 소시민의 모습이 된다.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준 역사적 현실의 극적 재연과 관객의 심금을 자극하는 세세한 설정은 곧 2008년을 살아가는 ‘늘근도둑’을 완성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한편 <신의 아그네스>로 연극 무대에 나서는 한지승 감독은 ‘외도’가 낯설지 않다. <고스트맘마>(1996)부터 <찜>(1998), <하루>(2000) 등 멜로물에서 주로 강점을 보여왔던 그는 드라마 <연애시대>로 감성멜로의 새 장을 열었다. 때문에 전작들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지승은 영화감독보다는 드라마 연출가로 더 익숙한 이름이다.

학력파문을 딛고 돌아온 윤석화가 다시 그릴 아그네스는, 처음 연극에 도전하는 한지승 감독에게는 부담으로 느껴질 만도 하다. 윤석화로서도 한 감독과의 협업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 감독은 윤석화가 부담보다는 힘이 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영화로는 봤지만 연극 버전으로는 본 적도 없는 <신의 아그네스>의 연출을 덜컥 맡은 것도 윤석화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묶어주는 하나의 코드는 ‘초심’이다. 윤석화는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한 <신의 아그네스>를 통해 배우로서 다시 태어나고, 한 감독은 늘 그렇듯이 기본에 충실하면서 오로지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힘쓴다는 자세다. 때문에 ‘좋은 작품’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있는 한, 장르의 경계는 한 감독에게 그다지 큰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그가 만들어낼 <신의 아그네스>가 기대되는 이유다.

5- 연극‘신의 아그네스’-윤석화(중앙)
6- 학생부군신위 (Farewell My Darling) 1996 | 감독 : 박철수 | 관련인물 : 최성, 문정숙, 권성덕
5- 연극'신의 아그네스'-윤석화(중앙)
6- 학생부군신위 (Farewell My Darling) 1996 | 감독 : 박철수 | 관련인물 : 최성, 문정숙, 권성덕

■ 마당놀이에서 보여주는 영화찍기의 다른 방식

박철수 감독은 무대가 아닌 마당에서 영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영화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1996)를 각색한 마당놀이 <학생부군신위>의 총연출을 맡아 신개념의 마당놀이를 보여주고 있다.

‘신개념’이라는 말은 관습적인 미사여구가 아니다. ‘마당놀이’ 하면 떠오르는 ‘어르신’ 관객들은 이 마당놀이의 유일한 관객층이 아니다. 상기했듯이 박철수 감독은 여전히 마당놀이에서 자신의 영화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사(현진씨네마)가 제작하는 만큼 마당놀이 최초로 ‘멀티스크린’를 설치해 영상을 틀고, 몽타주 기법을 배우들의 몸짓으로 표현한다. 기존의 마당놀이가 주로 국악에 의존한 것과는 달리 재즈, 랩 등 서양 대중음악까지 가미해 관객층의 폭을 넓히는 시도도 함께다.

영화 <학생부군신위>의 마당놀이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영화가 설명해주고 있다. 시골 노인 박씨의 죽음으로 시골집에 평소 왕래가 뜸하던 형제들이 모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떠들썩한 상갓집 이야기가 영화의 내용이다. 상갓집 마당에 모이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마당놀이다.

마당놀이 <학생부군신위>의 홍보사인 오락실의 박현주 과장은 “박철수 감독은 공연장이라는 실질적 공간 전체를 상가로 설정해 세상의 다양한 군상들을 몰아넣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삶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스크린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체험적 공감을 공연장의 현장성으로 획득한 것은 마당놀이라는 틀의 힘에 기댄 바가 크다.

이제는 스크린 밖으로 일탈하는 감독들의 행보가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장르 안에 묶여 있기보다는 더 좋은 텍스트를 위해, 더 좋은 텍스트의 더 적절한 표현방식을 위해, 끊임없이 답을 모색하는 창작자로서의 욕심은 일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