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녀·대략난감 20대·그레이 로맨스·까칠남·올드미스 시대상 반영

드라마는 현실과 판타지의 절묘한 줄타기다. 갈등하는 주인공을 보며 “저건 내 얘기야!”란 공감대를 뼈대로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멋진 로맨스와 성공스토리가 양념으로 첨가된다.

텔레비전이란 매체의 보수성은 그 사회의 가장 오래된 가치관을 반영하며, 시청률 1등 공신, 드라마는 시청자의 숨겨진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드라마는 사회를 반영한다. 대중의 가치관과 욕망을 발견하고 표현하며 충족시켜야 한다. ‘드라마의 시작은 갈등이다’는 말이 있지만, 갈등의 소재는 한국과 미국, 일본이 다르다. 연애와 가족에서 서사의 대부분을 찾는 한국의 드라마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셈이다.

■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캐릭터

한국의 드라마 역시 시대에 따라 다른 길을 걸어왔다. ‘눈물의 여왕’이 각광받던 70년대 <아씨>시대를 지나 가부장적 가치관을 보여준 80년대 <전원일기> 시대. 그리고 재기발랄한 90년대 <질투>시대를 지나 2000년대는 혼종의 양상을 보인다.

최근 선보인 드라마를 통해 한국인의 자화상을 찾아보자.

1) 청순녀는 가라, 억척녀가 뜬다

2008년 드라마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 캐릭터가 바로 ‘억척녀’다. 이전 청순가련형의 주인공이 사랑받던 시대는 가고 악착같이 자기 성공과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SBS 드라마 ‘워킹맘’과 ‘조강지처 클럽’부터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천하일색 박정금’까지 드센 아줌마들이 브라운관을 장악했다.

올해 7,8월 방영된 ‘워킹맘’의 최가영(염정아 분)은 직장 후배 박재성(봉태규 분)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일을 쉬게 되지만, 얼마 후 비정규직으로 복귀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정규직 자리를 되찾는다.

깐깐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 남편을 우습게 보는 모습 등이 다소 과장됐지만 드라마 속 최가영이 부딪치는 문제들은 오늘날 직장인 아줌마가 겪는 고충을 보여준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주인공 박정금은 한발 더 나아가 직업이 형사다. 커리어에 있어서 누구보다 터프한 모습을 보이지만, 용의자를 뒤쫓으면서도 생활비를 걱정하고 “이 짓 말고 먹고 살 것 없나”푸념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뛰는 박정금은 우리 시대 보통 아줌마다.

생계형 억척녀의 등장은 드라마 제목처럼 ‘워킹맘’이 대세를 이룬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성의 경제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강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는 것. 이미 자신의 정체성과 주어진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캐릭터들은 현실성을 갖는다.

직장인 주부 김 모(38) 씨는 “이미 일하는 엄마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결혼과 일을 병행하는 여성이 더 많다. 오히려 이런 드라마가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 한 발 늦은 설정인 듯하다”고 말했다.

2) '대략난감'한 2000년대 젊음

200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가 바로 ‘대략난감’한 젊은이들이다. 윤은혜를 스타덤에 올린 ‘궁’에서 시작해 ‘포도밭 그 사나이’, ‘쾌걸춘향’과 ‘풀하우스’ 등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야망이 없고 똑 부러진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니다. 갈등과 난관 속에서도 이들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대략난감한 청춘의 등장은 이 시대 젊은이와 닮은꼴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 씨는 작년 계간지 <비평>에 기고한 ‘시대와 여배우’를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은 그다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굶어죽지는 않으며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은 자신의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은 사회구조를 바꿀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안다. 이 씨는 “(2000년대 신세대는) 이전 세대처럼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막혀 있어 이를 타개해야 한다는 억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들은 어떤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으며, 변화된 상황에 무기력하다.

작년과 올해는 더 나아가 대략난감 캐릭터가 남성에게도 발견된다. 작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모범생 민호를 제외한 모든 고등학생(윤호, 범이, 유미)들이 이런 대략난감 캐릭터로 등장했다.

현재 방영 중인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의 양수경(최다니엘 분, 일명 ‘미친 미스양’)은 동갑인 여자 PD의 조연출로 사사건건 무시당하지만, 시종일관 명랑하게 촬영장을 누비고 다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시청자 이경희 (27) 씨는 “윤은혜가 연기 데뷔부터 인기를 모은 데는 대략난감한 극중 모습에서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무기력한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보면 대리만족도 얻는다”고 말했다. 매주 ‘그사세’를 시청한다는 김하나(27) 씨는 “조연출 양수경의 무기력하지만 명랑한 모습은 마치 내 주변의 친구를 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3- SBS '달콤한 나의 도시'
4- MBC '베토벤 바이러스'
5- MBC '스포트라이트'
6- SBS '조강지처클럽'

3) 그레이 로맨스

올 한 해 가장 파격적인 드라마 속 커플 중 하나가 KBS ‘엄마가 뿔났다’의 충복-영숙 커플(이순재, 전양자 분)이었다. 아내와 사별 후 홀로 살아온 ‘어르신’ 충복은 막내아들 삼석(김상중 분)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년의 로맨스를 즐긴다. 그레이 로맨스를 작품에 도입한 드라마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주인공 은수는 엄마(김혜옥 분)가 깐깐하고 무뚝뚝한 남편(이호재 분)의 시집살이를 ‘김포 아저씨’(이정길 분)와의 십수 년간 로맨스로 버텨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워킹맘’에서 주인공 최가영의 아버지 최종만은 김복실과 늘그막에 웨딩마치를 올린다.

드라마에서 부쩍 그레이 로맨스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인생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 대학생 김재원 씨는 “우리 세대는 ‘부모 인생은 부모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란 생각을 한다. 나이든 부모 세대도 그들만의 행복과 로맨스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레이 로맨스의 등장에는 드라마 주 타깃이 30~40대 경제활동 인구에서 50~60대의 장년층까지 넓어진 것도 한 몫 한다. 김하나 씨는 “이제 지상파 드라마는 넓어진 시청자 층을 커버하기 위해 가족형 홈드라마와 사극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장년층을 극중 주요한 위치에 설정하거나, 노년의 사랑을 그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4) 까칠남의 매력

지난해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주인공 안중근(이범수 분)은 제자 봉달희(이요원 분)에 대한 애정을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표현해 ‘버럭범수’란 별명을 얻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인기와 함께 찾아온 남성 캐릭터는 ‘까칠남’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지만, 괴팍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힘들고, 이들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것은 언제나 좌충우돌하며 사고를 일으키는 주인공이다.

올해 MBC에서 방영한 ‘스포트라이트’의 캡(언론사 사회부의 수석경찰기자) 오태석(지진희 분)과 사회부 2진 서우진(손예진 분), ‘베토벤바이러스’의 강마에와 두루미의 관계도 까칠남과 엉뚱녀의 만남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똥덩어리’로 대표되는 싸가지 없는 강마에의 말투는 주변인을 당황하게 만들고, 오태석의 ‘킬!’ 한마디는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극중 손규호 PD역시 특유의 잘난 척으로 똘똘 뭉친 말투와 안하무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출 능력을 인정받아 까칠남에 동참했다. 까칠남의 특징은 남을 위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외로움도 많이 탄다는 것이다.

머니투데이 김겨울 연예담당 기자는 “베토벤바이러스의 강마에는 한 두 장면만 보면 정말 싸가지 없는 캐릭터다. 하지만 한 회 분의 드라마를 모두 보고 나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카리스마와 열정, 자신이 지휘하는 석란시향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게 보인다”고 찬사를 보냈다.

시청자 정현경(36) 씨 역시 “처음 한 두 회를 봤을 때는 ‘왜 인기가 있나?’ 의아했지만, 꾸준히 베토벤바이러스를 보면서 강마에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겠더라. 음악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냉철하지만, 다른 부분은 여성이 채워줘야 할 캐릭터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5) 2000년대 신여성, 올드미스의 등장

2000년대 ‘칙릿’(영어 chick과 literature의 조합어. 젊은 여성을 겨냥한 소설을 지칭하는 신조어)형 소설이 각광을 받으면서 드라마 단골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캐릭터가 올드미스다.

2004년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시작해 올해 SBS ‘달콤한 나의 도시’‘온에어’에 이르기까지 20~30대 싱글 여성의 화려한 의상과 커리어, 로맨스가 섞인 드라마는 한국 젊은 여성의 현실과 욕망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거나 높이기 위해 남성과 끊임없이 대립을 하거나, 자아를 찾아 방황하는 기존 여성주의 드라마와 달리 이들은 자기계발과 연애에 열을 올린다.

이들 드라마와 <섹스 앤 더 시티>로 대표되는 미국판 골드미스 드라마와의 차이점은 30대 비혼녀(非婚女. 미혼여자와 이혼 후 홀로 사는 여자를 통칭하는 말)를 다룬 로맨스이지만, 우리 사회 30대 여성이 처해있는 팍팍한 현실이 근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올해 대표적인 칙릿형 드라마인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오은수는 연봉 2000만 원의 사보 편집자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선영 씨는 계간지 <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글 ‘올드미스 다이어리들, 자기긍정과 연애의 서사’에서 “이들은 자기계발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문화트렌드를 주도하는 중심적 소비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자기계발 이면에는 그들이 처한 어두운 현실조건이 자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조건에 강력한 나이주의(젊은 나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현실)로 인한 이중의 억압 상황에 놓여 있는 집단이다. 한편으로 1990년대 페미니즘 문화의 영향과 신세대 소비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로 자기 욕망과 자의식이 매우 뚜렷한 세대이기도 하다.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가 큰 집단”이라고 말한다.

이런 분석에서 보듯 국내 올드미스 드라마는 미국판 골드미스 드라마보다 한층 더 우울하고 현실적이다. 지난해 방영된 MBC 드라마 ‘9회말 2아웃’의 주인공 난희(수애 분)는 “서른 살, 잔치는 끝났다”고 드라마를 시작해 “우리 서른 살을 위해”라고 위로하며 극을 끝낸다.

시청자 이소정(29) 씨는 “9회말 2아웃의 노처녀들이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는 연하남의 ‘정기’를 받으려고 손을 갖다 대는 장면을 볼 때, 한편 웃음이 나면서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골드미스의 실상은 바로 이런 것일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일상을 반영한다. 2008년 한 해 등장한 새로운 드라마 캐릭터는 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출현이 ‘새로운 드라마’를 위한 시도였든, 이미 대세를 이룬 사회 트렌드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든 한국인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매스미디어인 방송 드라마와 함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