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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문화를 아시나요] 루저'와 '엄친아' 공존하는 서구
70년대 펑크·90년대 그런지 문화 통해 시작…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아




김청환기자 chk@hk.co.kr



1-사진제공=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
2-투팍 3-에미넴


영국의 한 길거리 벽면. 원숭이가 핵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상자의 펌프를 열심히 누르고 있다. 땅바닥에는 전선을 의미하는 주황색 줄을 그렸다.

줄을 따라 다시 올라간 벽면에는 바나나에 시계가 묶여있다. 원숭이가 누르는 핵폭탄 그림은 은유적으로 핵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하는 강대국의 파워 게임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뱅크시라는 익명의 작가다. 그는 이 외에도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경찰, '살인(KILL)'이란 문구가 쓰여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녀에게 접근하려는 구호반원을 방송 리포터가 제지하는 그림 등 체제 저항적인 벽화로 유명하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 한 사이먼 하텐스톤 <가디언 언리미티트> 기자는 그를 "지미 네일(영화배우)과 마이크 스키너(영국의 랩가수)를 섞은 듯한 인상의 28살의 남자로 은 귀걸이, 은사슬, 은니를 하고 있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고 적고 있다.

인터뷰에서 뱅크시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고교 중퇴자이며 사소한 일로 체포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뱅크시가 영국 도심의 건물에 그린 한 낙서화는 그려지자마자 건물주에 의해 보호막이 둘러쳐졌다.

서구의 '루저(Loser)'문화는 이미 70년대 영국의 펑크문화, 90년대 미국의 '그런지 문화(Grunge; 주변적 거리문화)' 를 통해 시작됐다.

문화는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고 추구한다는 통념과 달리 패배자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며 저항을 의미하는 루저문화는 서구사회에서 이미 '엄친아'문화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Winner takes All) 방식인 전면적 세계화의 조류에 따라 숫적으로 늘어나는 패자의 저항으로 루저문화는 더욱 힘을 받게 될 전망이다.

'루저', 대중음악의 한 코드로 굳건

패배자 정서의 '루저'문화는 서구에서 이미 대중음악의 한 코드로 굳건한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 경기 불황기 전사회적으로 늘어난 '루저'와 함께 이들의 문화는 이미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쌍둥이 적자'로 몸살을 앓던 90년대 미국에서 데뷔한 슬럼가 태생의 투팍은 욕설과 경찰에 대한 비판 등의 노랫말로 할렘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미 미국의 대중음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이르렀다. 스스로를 백인쓰레기 (white trash)라고 부르는 에미넴의 독설과 자조적인 가사는 백인 빈민층을 중심으로 그의 자리를 다지게 했다.

투팍과 에미넴이 상징하는 갱스터 랩과 힙합은 이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위너(승자)'가 돼버린 '루저(패자)' 논쟁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상업화 한 루저의 자기정체성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그룹 역시 여전히 '루저' 계층이다.

이들은 모두 90년대 아버지 부시 시대에 경기가 침체되고 사회가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을 때 '그런지 문화'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70년대 반전과 반핵 등을 외쳤던 비틀즈, 롤링 스톤즈 등에서 시작된 루저문화의 기원 중 하나인 펑크음악 역시 개러지(Garage) 락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70년대 영국 펑크 음악은 IMF체제를 맞은 영국의 숫적으로 늘어난 '루저'세대의 영향을 받았다. 1977년 락 르룹 섹스 피스톨스는 공연장에서 영국 여왕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불황기의 영국 청년들은 그들에 열광했고 펑크의 시작을 알렸다.

장 미셀 바스키아의 1984년작 'Thig'


루저 정서 담은 거리 미술의 반격

거리낙서인 그래피티는 서구에서 루저문화의 굳건한 전통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엄친아'미술과 공존하고 있다. 슬럼가를 중심으로 시작한 서구의 그래피티는 이미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고 있다.

뱅크시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 가서 팔레스타인을 포위하기 위해 쌓은 벽면에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미국의 슬럼을 중심으로 그래피티는 90년대 그런지 문화와 함께 유행하면서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루저'계층의 예술로 기능했다.

제도권 미술에서도 작가적 정체성과 작품의 세계에서 패배자 정서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엄친아'미술과 공존해왔다.

미술가 마크 퀸은 구족화가인 앨리슨 래퍼의 임신한 모습 조각상을 만들어 런던 트래펄카 광장의 넬슨 제독상 옆에 나란히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앨리슨 래퍼는 장애인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 위대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현대 미술의 대표작가인 장 미셸 바스키아 역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화랑과 미술관이 아닌 길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그는 형식파괴적인 작품으로 미술사에 새 장을 열었다. 문화파괴 행위라 불렸던 반달리즘(vandalism)은 하나의 예술형태이자 문화조류로 자리잡은 미술계 '루저'문화의 기원 가운데 하나다.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익명으로 주류사회에 저항하는 그래피티는 루저문화의 전형"이라며 "이들 미술은 주류문화가 갖고 있는 억압, 권위, 엘리트의식을 조롱하며 저항하고 허위의식에 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 속 루저

시대상의 반영인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불황기였던 70년대 영국 펑크, 90년대 미국 그런지 문화에서 비롯한 루저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루저가 양산되는 세계화체제를 반대하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 프랑스 청년 문화의 반영 역시 그런 예다.

일본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는 <스무살, 도쿄>(2008)에서 시대의 물결과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늘날 청년의 패배자 정서를 그렸다.

<남쪽으로 튀어>(2006)에서는 사춘기 소년 주인공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아버지가 선택한 남행길에 동참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공중그네>(2005) 역시 정신과 병동을 배경으로 이 시대 루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2001)에서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또 한번 퇴학을 당해 집에 돌아오기까지,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라며 헤매이는 48시간을 독백 형식으로 담고 있다.

작가의 경험적인 패배자 정서를 사춘기 소년인 주인공에 녹여낸 것이다. 샐린저는 13살 때 맨해튼의 유명한 맥버니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2년 성적 불량으로 퇴학을 당한 경험이 있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1990)은 뉴욕의 노숙자를 묘사한 '루저'문학의 고전격이다.

프랑스 영화 감독 미셸 공드리는 <비카인드 리와인드>(2009)에서 시골의 비디오 가게 주인이 비디오 테이프가 다 불타 버리자 "고객 맞춤형" 비디오를 직접 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코믹하게 다뤄 '루저' 문화의 전형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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