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폭력을 성찰하다] 가해자 단순 비난·구조적 폭력 탓 않고 근본적 원인을 생각하게 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상계동 빈민촌 철거 장면
문화가 폭력적일 수 있을까? 한때 '문화'시민은 좌측통행을 한다고 지하철역 계단에 써 붙여 두던 것을 생각하면, 문화는 뭔가 질서정연한 것이어서, 문화가 폭력적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오늘날의 대중'문화' 또는 시위'문화'가 폭력적이라고 하는 말들을 생각하면, 식인풍습이나 여성할례가 폭력적이지만 나름의 문화인 것처럼, 폭력적인 것도 얼마든지 문화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문화가 폭력적이라는 지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모든 문화가 어느 정도 폭력적이어서 우리가 폭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 사회가 폭력을 상대적으로 더 세련되게 처리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폭력을 처리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폭력문화를 추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저 그렇게 외치는 사람의 도덕적 정당성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오히려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은 그러한 목소리와 무관하게 개인적인 수준과 집단적인 수준에서 폭력을 동형적으로 재생산하며 계속해서 확산될 것이다. 폭력적인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이나 거칠고 폭력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고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발달한 매체환경은 오늘날 개인적 수준의 폭력을 손쉽게 집단적 수준으로, 심지어 지구적 수준으로까지 확장시킨다. 핸드폰 카메라에 찍힌 (교사에 의한 또는 학생에 의한) 학교에서의 폭력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어 고발되기도 하고 상품처럼 넓은 시장에서 소비되기도 한다.

또한 테러리스트의 비디오 메시지와 인질의 참수형 장면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어 또 다른 모방적인 폭력과 그에 대한 보복성 폭력을 낳기도 한다. 이 시대의 문화적 조건은 폭력이 번식하기에 너무도 좋은 환경인 것이다.

망루전 걸개그림
그 동안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현실성 없이 과장된 것을 일컫는 수식어로 애용되던 '할리우드'라는 단어는 미국 국방성과 쌍둥이 빌딩에 대한 더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테러공격의 극적인 성공으로 인해 오히려 현실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영화는 폭력적인 현실을 과장하여 모방하고, 현실은 다시 영화 속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모방한다. 현실에 의해 추월당한 가상현실은 경쟁하듯 더욱 폭력적으로 내닫는다.

폭력을 보는 우리의 시각

권력은 마치 자신의 기원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이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폭력을 바라보는 권력의 시각은 그러나 언제나 교정적이고 처벌적이다.

권력은 폭력을 개인의 범죄로, 따라서 개인에 대한 처벌을 통해 그 폭력성을 교정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국가의 권력이 각종 폭력 범죄를 범죄자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여 처벌하려 하듯이 오늘날 제국적 권력은 테러를 테러리스트 집단의 문제로 환원하여 응징하려 한다.

폭력에 대한 권력의 시각이 교정적이고 처벌적이라면, 그에 대한 반권력의 시각은 폭로적이다. 폭력의 기원이 권력임을, 폭력과 권력이 공범관계임을, 또는 폭력이 오히려 애꿎은 희생양임을 폭로하려고 한다.

학원에서의 폭력이 사회 전체의 폭력을 모방한 것임을, 폭력범죄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 것임을, 테러리스트의 폭력이 지구적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임을 폭로한다. 따라서 개인적 수준의 처벌로 결코 폭력이 제거될 수 없고 구조적 문제의 해결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폭력에 대한 권력의 교정적 시각에 동조하면서 우리는 마치 자신의 결백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처벌적 폭력의 사용에 열광하기도 하고 그것을 관음적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폭력시위'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을 바라보면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처벌방식을 둘러싸고 논쟁하면서, 미국의 반테러 전쟁을 지지하면서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 폭력시위자가 아니고 빨갱이가 아니고 성범죄자가 아니고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러한 폭력을 낳은 원인을 외면한다.

우리는 또한 폭력에 대한 반권력의 폭로적 시각에 동조하면서 권력의 폭력성과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개인적·집단적으로 사용되는 폭력이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가해자를 범죄자가 아닌 그저 폭력적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단순한 행위자로 만들고 도덕적 면죄부를 발행한다.

폭력의 미시적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지구적 불평등이 낳은 피해자이고, 진짜 가해자는 이 폭력적인 시스템 속의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위와 같은 시각들 간의 대립 속에서 정작 소외되는 것은 희생자이다. 폭력의 희생자는 어디까지나 권력이 자신을 관철하는 데에 필요한 한에서, 그리고 반권력이 그러한 권력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데에 유용한 한에서 동원될 뿐이다.

용산에서 죽은 경찰과 철거민은 그 자체로 표상되고 이해될 수 없다. 텍스트는 콘텍스트 없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반권력의 대립적인 해석의 자장 속에서 폭력의 희생자는 그 희생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소외된다.

폭력의 포르노그래피 혹은 예술

오늘날 폭력은 직접적으로 체험되기보다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된다. 희생자가 겪은 직접적인 폭력이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타인에게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폭력은 공적인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때로 폭력은 자신의 맥락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의미맥락을 잃어버린 폭력의 이미지들은 대중매체 속에서 포르노그래피처럼 식상한 모습으로 넘쳐나게 된다.

맥락 없는 폭력의 이미지는 포르노그래피 속의 맥락 없는 성관계처럼 지루하다. 콘텍스트가 없는 텍스트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가 그 무맥락성 덕분에 다양한 가상적 맥락과 만나서 무한한 의미를 산출함으로써 오히려 오락적 기능을 수행하듯이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폭력적 이미지들도 본래의 의미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가상적 맥락을 만나서 오락이 된다.

포르노그래피와 다르게 예술은 탈맥락화한 폭력적 텍스트에 본래의 맥락을 되찾아준다. 권력과 반권력의 왜곡된 해석 사이에서 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소외되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게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오락과 달리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예술은 폭력의 복잡한 실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가해자만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정의감에 넘쳐 구조적 폭력만을 탓하지 않게 한다. 예술은 포르노그래피적 단순함으로 우리를 흥분케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폭력을 세련되게 처리할 제도적 장치와 함께 폭력을 재맥락화함으로써 희생자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불편하게도 예민하게 만드는 개인과 집단의 예술적 능력이다.

공진성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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