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스타일을 만나다]스타일리시한 일반인 찍은 스트리트 패션사진 인기

지난 4월 말 도산공원 근처에 미국 디자이너 릭 오웬스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수입사인 제일모직은 매장 오픈에 맞춰 사진집을 냈는데 그 테마가 스트리트 패션 사진이었다. 연예인, 디자이너, 뮤지션 30여명에게 릭 오웬스의 옷을 입히고 마치 멋쟁이들의 평소 패션을 포착한 듯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찍은 것.

"사토리얼리스트 같은 분위기가 콘셉트였어요."

촬영을 맡은 패션저널리스트 홍석우 씨의 말이다. 사토리얼리스트는 거리 패션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 스콧 슈먼의 블로그 이름이다. 하루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 블로그에는 스콧 슈먼이 세계 거리 곳곳에서 포착한 무명의 패션 리더들의 사진이 매일 올라온다.

남성복 브랜드 커스텀멜로우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홍대와 가로수길로 나간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대상은 커스텀멜로우의 콘셉트인 영 젠틀맨 룩을 개성 있게 연출한 남자들.

stylefish
티셔츠에 넥타이를 매거나 포멀 재킷에 반바지를 매치하는 등 파격적인 패션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화한 사람들의 사진이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협찬 사진 속에서 의무적으로 웃고 있는 연예인 대신 일반인 패셔니스타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감각에 홈페이지 오픈 초기 하루 방문자 수는 2000명을 넘어섰고, 사진들은 여러 사이트로 퍼 날라져 또 그곳에서 2차 토론이 벌어졌다. 거리 패션에는 대체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길래?

패셔니스타들, 거리로 나오다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는 패션이라 더 반향이 큰 것 같아요."

스트리트 패션을 담는 잡지 크래커유어워드로브(이하 크래커)의 장석종 편집장은 스트리트 패션에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예인이나 모델의 모습은 멋있지만 너무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 때문에 따라할 생각이 쉽게 들지 않죠. 하지만 자기랑 별 다를 것 없는 일반인들이 스타일리시하게 꾸민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만 입으면 멋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거에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믿는 자학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스트리트 패션은 일종의 검증된 희망이다. '난 안 될 거야'가 모토인 그들의 옷 입기에 있어서, 소시지처럼 통통한 종아리와 큰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일반인들의 모습은 백 마디의 스타일링 팁보다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빈티지 코트와 꼼데 갸르송의 티셔츠, 서상영의 바지, 보세 신발을 함께 매치한 20대 남자의 사진은 패션을 글로 배웠던 이들에게 가격과 국적과 브랜드를 뛰어 넘어 스타일을 찾아내는 법을 알려준다.

스트리트 패션이 본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다. 당시만 해도 하위 문화에 속했지만 패션계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점점 더 커졌다. '파리 길거리 패션', '도쿄 길거리 패션'이라는 말이 익숙해지고, 잡지에서 빼놓지 않고 다루는 콘텐츠가 됐으며,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블로거들이 생겨나기까지.

현재 스트리트 패션은 역으로 하이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줄만큼 그 영향력이 높아졌다. 가장 유명한 스트리트 패션 블로그인 사토리얼리스트의 하루 방문자 수는 이미 보그가 속해 있는 세계 최대 온라인 패션 사이트인 스타일닷컴을 넘어 섰다.

내 롤 모델은 옆 집 언니?

feetman seoul.com
스트리트 패션의 부상은 무엇을 의미하나? 스타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일부 전문가에서 일반인으로 넓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네이버가 '지식인' 서비스를 개발한 것만큼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개개인이 스타일에 대해 묻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패션을 주제로, 주입이 아닌 이런 식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크래커가 창간된 것이 2007년으로, 그 전까지는 국내에 스트리트 패션을 본격적으로 다룬 인쇄 매체가 없었다. 2000년대를 전후로 몇몇 웹진에서 거리 패션을 실었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취지, 또는 사명감에서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스타일에 대한 수요도 공급도 없었으니까요."

패션의 기능 중 사회적 과시 기능만 죽어라 사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스타일은 별로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와 유행, 둘뿐이었다.

your boyhood.com
"일단 스타일리시한 사람이 없었고, 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잡지마다 매번 같은 사람이 나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찍는 사람도 없고요.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하라주쿠의 한 장소에서만 스트리트 패션 찍는 사람을 10명은 본 것 같아요. 그 외에도 골목골목마다 다 있더라구요."

그러므로 최근 국내에서 감지되는 스트리트 패션에 대한 열광은 일단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아티스트들을 필두로 창의적 옷 입기의 좋은 예들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유되면서 이에 대한 피드백도 활발하다. 백화점에 한정돼 있던 쇼핑 공간도 편집숍, 벼룩 시장, 재래 시장으로까지 다양화되었고, 무엇보다 한국 패션의 취약점이었던 빈티지 활용과 믹스 & 매치에 대한 기지가 늘었다.

과거에 소수 연예인들의 패션을 다수가 우르르 따라 하는 형국이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롤 모델을 스스로 결정한다. 그것은 단골 카페의 사장일 수도 있고, 같은 학교 학생일 수도 있으며, 물론 연예인일 수도 있다. 여전히 하이 패션의 큰 줄기를 따라가고 잡지의 팁을 참고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왜 패션을 소비해야 할지에 대한 개인의 철학은 흔들리지 않는다.

스트리트 패션 사진은 해외에 한국의 모습을 가장 감각적으로 알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올해 호주 라이선스 판을 준비 중인 크래커의 장석종 편집장은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어이 예쁜 배경을 찾아 이동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도록 한다. 외국인들에게 옷뿐 아니라 한국의 거리도 함께 보여주고 싶어서다.

"한때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스트리트 패션은 하나의 문화이자 패션을 말하는 중요한 방법이에요. 더불어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구요. 일본의 경우 <프루트>나 <큐>, <스트리트> 등 스트리트 패션 잡지들이 일본 패션을 해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