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두만강>, <바람과 모래>, <타이거 팩토리>, <댄스 타운> 등 눈길

두만강
"소설을 읽는 도중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내가 서른 몇 해를 살아오며 느낀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촉감이 느껴졌다. 실제 배우를 통해 재현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졌다."

영화 <악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상일 감독은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소설에서 느낀 촉감은 일종의 동시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예술 작품은 우리가 삶과 현상과 사회에 대해서 체험해 왔으나 콕 집어 정리하지 못한 것들, 혀끝에서 맴도는 말과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가려움증, 막연한 정서의 바닥 같은 것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스크린으로부터 세상의 본질을 본다. 뉴스 속 정치인들의 말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 세계화가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동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치관과 힘들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겨우 몇 시간 동안, 제한된 배경과 이야기만으로도 꿰뚫어 내어 관객의 심장 가까이에 전해주는 영화들이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동시대적 촉감을 지닌 아시아 영화와 그 감독들을 소개한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그며 써내려갈 수 있는 자"라는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의 정의처럼 이들은 세상을 진심으로 대했으며 그 어둠으로 인해 종종 더 오래, 먼 길을 왔다. 그들의 현장 감각은 전지구화의 지각 변동 위에 놓인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만한 거울이다.

세계의 경계 혹은 경계의 세계, 장률 감독의 <>

바람과 모래
겨울이면 도 어김없이 얼어붙는다. 성인 남자가 올라서도 끄떡없는 언 강은 길이 된다. 이때만큼은 중국과 북한의 거리도 부쩍 가깝다. 드문드문 보초를 서는 군인들 눈 바깥에서, 밤을 틈타 굶주린 북한 사람들이 중국 조선족 마을로 건너간다. 한 끼 얻어먹기도 하고, 숨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강을 얼리는 추위는 응당 사람에게도, 주린 사람에게는 더더욱 매서운 것이어서 도중에 얼어 죽는 이도 제법 된다. 군인들은 매일 시신을 치운다. 영화 <>의 배경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국 국경의 한 조선족 마을이다.

마을의 아이들은 즐비한 비명횡사들, 국경 지대의 삼엄함, 개발에서 소외된 가난함과 작고 오래된 마을의 정체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북한 아이들과 함께 '볼시합'을 하며 친해지지만 순수한 시절은 잠시다. 어른들은 '저쪽' 사람들 때문에 피해가 크다며 탈북자 감시를 강화하고 탈북자 밀입국을 도왔던 가겟집 아저씨는 잡혀가며, 소녀는 집에 하룻밤 숨겨준 탈북자에게 강간당한다. 군인들은 '볼시합'하는 데까지 쫓아온다. 한 아이가 신고했기 때문이다. 북한 소년이 끌려갈 때 그와 친했던 한 조선족 소년은 건물 지붕에서 뛰어내린다.

<>을 연출한 조선족 출신 중국 감독 장률은 <망종>과 <이리>, <경계> 등의 작품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잘 알려졌다. 그의 영화는 경계에서의 삶을 담는데, 이는 지엽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주가 보편화되고 환경이 급속도로 변하는 세계의 보편적인 상태다.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에도 돈 벌러 한국에 간 조선족 사람들의 사연이 언급된다.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남들처럼 잘 살려면 조금만 더 참고 견디자"고 말한다. 어떤 아이의 부모는 한국의 한 창고에서 일하다 타 죽었다.

지난 10일 <>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조선족 소년이 자살한 이유를 묻자 장률 감독은 "엉망이 된 세상에서 의와 충성을 지키는 이들은 아이들뿐"이라고 대답했다.

왕빙 감독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는 거짓말과 기만이 너무 많습니다. 의와 충성을 지키는 것은 본능인데, 그것을 목숨 던져야 할 수 있는 일로 만든 건 어른들 아닙니까?"

이념이 매장한 역사, 의 <>

대대적인 원유 개발이 이루어지는 중국 서부 고비사막 근처의 빈곤 지역을 840분 동안 조명한 <원유>, 중국 정부의 철거 명령이 떨어진 센양의 철강공장지대를 551분 동안 보여준 <철서구> 등의 전작을 통해 집요하게 기억하는 디지털 영화 미학을 추구해 온 중국 감독 왕빙의 카메라가 이번에는 1960년으로 향했다. 문화대혁명의 전야와도 같았던 당시, 반우파적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우파로 '판별'된 사람들은 혹독한 '사상개조'를 받아야 했다.

고비사막 근처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농장도 그 현장 중 하나였다. 말이 사상개조지, 인간 이하의 생활이 강요됐다. 들짐승이 살 것 같은 굴이 잠자리였고 고된 노동 후에 주어지는 것은 묽은 죽 한 그릇이 전부였으며 매일 옆 자리 사람이 죽어 나갔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풀을 뽑고, 쥐를 잡아먹었다. 새로 묻은 시신은 다음날 엉덩이나 다리살이 도려내어진 채 내팽개쳐져 있기도 했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고, 아직까지도 중국 내부에서 쉬쉬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사건이 의 첫 장편극영화인 <>를 통해 공개됐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이곳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가 시신을 찾아 밑도 끝도 없는 사막으로 뛰어 나가는 장면이다. 아내의 황량한 뒷모습 주변으로 바람은 무참하게 불고 모래를 겨우 '덮은' 시신들이 끝없이 누워 있다. 그것이 당시 정부가 추진한 '혁명'의 한 풍경이었다. 이념이 매장해버린 삶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역사도 익히 알고 있다.

타이거 팩토리
인터뷰

영화 첫 머리에 소설이 모티프가 됐다고 나오던데.

양 시엔 호인 작가의 <자빙고를 작별하며>라는 책을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2004년에 원작자와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소설 중 일부만 담겼고, 스스로 취재한 바들이 더 많다.

취재 과정이 길었나 보다.

중국에서도 오래된 이야기여서 관련자들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이 워낙 넓지 않은가. 생존자는 물론 농장 관리와 주변 농민들 등을 만났다.

그중 인상 깊었던 사람들이 있나.

댄스 타운
남편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영화 속 미망인은 한 70대 후반 할머니의 실제 사연이다. 4~5살 때 아버지를 따라 농장 생활을 경험한 이도 있었다. 농장 관리들의 생활도 녹록치 않았던 것 같다. 한 관리의 아내는 근처 하천에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떠올렸다. 아직도 현장엔 그 시신들이 남아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굴은 만든 것인가.

사진, 영상 자료 등을 참고해서 재현했다. 가능한 한 실제와 같게 만들었다.

영화 속 배경이 겨울이던데, 그런 계절에 사막에서 촬영하려면 힘들었겠다.

2008년 10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찍었다. 환경이 악랄하고, 소재도 참혹하다 보니 스태프들도 점점 지쳐갔다. 심리적 압박 때문에 중간에 일을 그만 둔 사람도 있었다.

전규환 감독
중국에서는 상영했나.

못 했다. 영화도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제작했다.

발전에 희생 당한 인간, <푸주한과 그의 아내>와 <>

중국 감독 가오숑지에가 <푸주한과 그의 아내>를 통해 그려낸 중국의 현재는 한국의 과거를 반복하는 것 같다.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전통적인 습속이 밀려나고 지역 간, 계층 간 골이 깊어지는 과정을 중국의 절기에 따라 펼쳐 놓은 작품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 족했던 시골 마을 푸주한이 도시 생활을 꿈꾸며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다. 갖은 고생 끝에 아내를 다시 만난 푸주한은 그녀를 죽이고 만다. 도시의 소용돌이는 시골 마을에서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살았던 이들을 무력하고 곤궁한 처지로 전락시킨다. 순박했던 푸주한이 살인자가 되어 버리는 결말은 우리가 발전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동시대를 이끌어오는 동안 간과되고 희생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말레이시아 감독 우밍진은 일본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아이를 낳아 파는 소녀의 이야기를 <>에 담았다. 말레이시아 내 미얀마 이주민에게 일어난 실화를 모티프 삼았다. 영화 속 소녀는 쪽방에서 자며 주방일이나 농장일을 하기 위해 봉고차에 실려 돌아다닌다. 감정은 거세한 듯 표정 없는 얼굴이다.

가장 슬픈 순간은 소녀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다시 거두어들일 때 온다. 소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관계를 가진 이주민 남자에게 마음을 열지만, 그에게는 이미 가족이 있다.

그로부터 지난번 시도에서 사산한 줄 알았던 아이가 몰래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실패하고,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 대해 돈을 받고 이주민 남자를 밀고하는 것으로 타협한다. 그녀를 고용한 이모는 "이주민은 신경 써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소녀가 필사적으로 꿈꾸는 것은 고작 일본에서의 이주민 생활이다.

현대사회의 모나드 혹은 맨 땅으로서의 도시, 의 <>

의 <댄스타운>은 전작 <모차르트 타운>, <애니멀 타운>을 잇는 작품이다. 이 '타운 3부작'의 배경은 서울이되, 서울만은 아니다. 차라리 그곳은 발터 벤야민이 현대 사회의 속성이 집약되어 있는 '모나드'라고 말했던 도시 그 자체다. 인물들은 각자의 운명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을 테지만, 다만 스쳐 지나가고, 도시적 삶이라는 정체 없는 정체에 기이하고도 단단하게 붙들려 있다.

<댄스타운>의 주인공인 탈북여성의 사연은 상징적이다. 남한의 포르노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밀고 당한 그녀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탈북했다. 뒤따라 오겠다던 남편의 거취도 모른 채, 한국에서의 새 삶이 시작된다. 탈북자 모임에 나가고 일자리를 구하고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자원봉사도 시작한다.

한국사회에 아무런 연고도 기반도 없는 인물이기에, 그녀의 궤적은 서울의 '맨 땅'에 매우 가깝다. 대중매체가 외면하는 약자들의 삶의 터전도 누빈다. 도시락을 배달하던 노인과 장애인의 집이 철거 대상이 되자 그녀는 함께 방을 구하러 다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상한 듯이 묻는다. "여기서는 돈이 있어도 집을 못 얻습니까?

남조선 연속극 보면 돈만 있으면 다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노인이 길바닥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고, 자살하려는 장애인을 구해낸 그녀는 처음으로 엉망으로 술에 취했다가 골목길에서 경찰에게 강간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이 탈북 직전에 붙잡혀 공개처형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손목을 긋지만 그녀를 감시하던 국가정보원 직원에게 발견되어 살아난다.

도시의 습속이라고 할 만한, 어떤 보이지 않는 법칙 같은 것이 그녀의 드라마를 장악하고 있다. 그녀의 뜻대로는 심지어, 죽을 수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꿈이나 의지라고 굳게 믿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단지 현대적 삶의 풍속일까. 영화는 줄곧 이사 문제를 걱정하는 국가정보원 직원과 불법 낙태를 한 여고생을 탈북 여성과 스치도록 만들고, 겹쳐 놓으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보편적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장면, 여고생이 갈대밭에서 본드를 불다가 쓰러진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긴 갈대밭 한 가운데에 구멍만 남아 있고 주변은 무심하다. 사람들도 자동차도 금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제 갈 길을 간다.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감독이 오며가며 발견한 중량천 부근이라고 한다.

인터뷰

제목이 왜 <댄스타운>인가.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슬퍼서든 기뻐서든 각자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찍었고, 탈북자가 주인공이지만 단지 한국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서울 풍경이지만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도시에도 이주민이나 난민이 있다.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다양하고 격차가 큰 삶이 공존하는 곳이 오늘날 도시다.

영화를 만들 때 탈북자를 취재했나.

영화 속 인물이 포르노를 본 것을 밀고당해서 탈북했다는 설정은 실제로 들은 이야기다. 특정 이념 때문에, 혹은 큰 사건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이런 이유로도 탈북한다는 사실이 인상 깊어서 넣게 되었다.

여고생이 쓰러졌는데 아무도 모르고 일상은 변함없는 마지막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도시의 많은 상처들이 돌보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아무리 시민 단체가 열심히 활동해도 모든 난민을 보호해주지는 못하지 않나.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타운 3부작'은 영화제를 통해서만 공개되었다. 언제 개봉하나.

<모차르트 타운>과 <애니멀 타운>은 내년 초쯤 개봉한다. <>은 몇몇 해외 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난 후 여름쯤 개봉할 예정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