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북ㆍ화보서 매거진ㆍ블로그로, 쇼핑 욕구 자극서 공감대 형성으로
패션이 인문학자들의 외면을 받는 이유는 이런 즉각적이고 가벼운 성질 때문이다. 해석도, 설명도, 아니 뇌 세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패션의 즉물적인 소통법은 묵직한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는 천박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패션 브랜드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방식은 비슷비슷했다.
콘셉트를 잡고 옷을 만든 후 사진을 찍어 보여줬다. 반응은 '꺅' 아니면 '흥'. TV 속 연예인을 향한 대중의 반응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방적이고 피상적이며 짤막한 소통이다. 그러나 지금, 약간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접근하는 브랜드들이 있다. 일단 룩북이나 화보에서 매거진, 또는 블로그로 고객 접견 장소가 바뀌었다.
그들은 빼곡한 글로 비주얼의 허무함을 메우기도 하고 예술가들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콘셉트를 대신 설명하게 하기도 한다. 아니 아예 브랜드 이야기는 집어 치우고 모델, 디자이너, 화가, DJ, 스타일리스트, 사진가들을 불러 모아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잡지를 덮고 난 후 남는 것은 정보가 아닌 대화다. 제품이 아닌 생각이다. 쇼핑 욕구가 아닌 공감대다.
옷 한 벌이 들려주는 신산한 이야기
'패션에서의 레플리카는 때로 양면의 얼굴을 보이기도 한다. 레플리카 시계, 레플리카 백 등 일명 '가품'을 일컫는 부정적인 의미와, 레플리카가 가지고 있는 '복원'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하나의 컨셉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유니섹스 캐주얼 브랜드 카이아크만의 올 겨울 콘셉트는 레플리카다. 복원을 주제로 한 이번 시즌에 그들은 미국육군항공대의 폭격기 승무원 점퍼를 본뜬 무스탕 점퍼, 미공군이 혹한 지역 근무 시 착용했던 비행 점퍼를 모티브로 한 사파리 점퍼를 선보였다. 제품들은 카이아크만이 발행하는 매거진 '유니섹스'에 실렸다.
그레이스 켈리 시대의 곡선을 차용한 보테가 베네타의 코트와 70년대 여성 파워를 영감으로 디자인된 펜디의 밍크 코트를 가지고 있는 런던의 패션 학도 나탈리아는 레플리카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레플리카는 단순한 제품 복제가 아닌 사람의 캐릭터를 복제하는 일이다. 한 스타일 아이콘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레플리카다.'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을 거치면서 수많은 무스탕 중 하나에 불과했던 카이아크만의 점퍼에는 특별한 의미가 덧입혀진다. 1년에 두 번 발행되는 잡지 '유니섹스'에서 그나마 브랜드의 제품이 소개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전까지는 사랑과 평화, 또는 유니섹스 등을 주제로 아트워크와 패션피플들의 인터뷰를 담아 왔다. 그들이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하는 이들은 주로 이제 막 패션계에 뛰어들었거나 뛰어들 준비가 된 이들이다. 주류에 편입되지 않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티스트들은 젊고 신선한 브랜드의 콘셉트를 대변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다.
40~50대를 위한 머추어 캐릭터 브랜드 르 베이지 역시 1년에 한 번, 9~10월경 잡지를 발행한다. 중년의 감성과 소득 수준에 맞게 한층 우아하며, 또 한층 부유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얼마 전 나온 2호의 주제는 '안티에이징'으로 윤여정, 이미숙, 최명길, 전인화, 김지호 등 5명의 톱 여배우가 총출동해 발간 기념 화보를 찍어 화제가 됐다. 군살 하나 없는 몸매와 잘 가꾼 피부를 가진 그들은 르 베이지가 추구하는 '20대 못지 않은 스타일에 내적 아름다움까지 갖춘 중년 여성'에 어울리는 엄선된 아이콘들이었다.
헤어, 메이크업, 사진 등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탭들이 달려 들어 완성한 화보는 중년 여성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외적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한편, 인터뷰에서는 중년의 고독과 그 고독을 마주하는 자기만의 방식,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 등을 기탄 없이 풀어 놓았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르 베이지의 추동 컬렉션에는 중년의 우아함과 관능미에 그 나이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단단함, 카리스마가 더해졌다.
"르 베이지의 옷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나이 대 여자들의 관심사나 라이프 스타일을 담아 공감대를 일으키려고 해요. 이번 호에서는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이 진정한 젊음'이라는 메시지를 뷰티, 패션, 푸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달했어요."
말하고 걷고 먹는 패션 아이콘들
한결 가볍게 접근하는 브랜드도 있다. 올해 7월 론칭한 커밍스텝이 선택한 소통 수단은 블로그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패션 브랜드는 많지만 커밍스텝의 블로그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올라온다.
브랜드의 새 제품이나 이벤트 소식을 포스팅하기도 하지만 올 겨울 유행할 양털 코트, 해외 모델 스타일 따라잡기, 강동원 VS 류승범 스타일 대결, 가로수길에 새로 문 연 카페 탐방기 등이 무작위로 올라오는 것. 내용의 분량이나 말하는 방식은 살짝 다르지만 콘텐츠의 방향은 일반 패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커밍 스텝 블로그의 외부 에디터 '슈퍼 썬'의 말이다. 블로그는 일주일에 한 번 마케팅 팀 인력인 커밍 에이치, 커밍 제이, 그리고 외부 에디터 슈퍼 썬,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기획 회의를 한다.
이 세 명의 30대 여자가 커밍 스텝의 문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들이다. 그들은 블로그에 어떤 내용을 올릴지 결정하고 그 내용들 사이사이에 어떻게 브랜드의 제품을 언급할지에 대해 고민한다.
"개인 블로그가 재미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브랜드만 언급하지 않고 이 브랜드, 저 브랜드, 거기에 음식, 음악, 책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아무리 한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해도 계속 그 옷만 입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대놓고 홍보하는 브랜드 블로그는 좀 위험해요."
커밍 스텝의 블로그는 자못 치밀하다. 브런치를 먹고 영화를 보는 자연스러운 주말 나들이를 이야기하던 중 문득 친구가 매고 온 커밍 스텝 가방에 주목하기도 하고, 올 겨울 트렌드인 레오퍼드 무늬를 한창 설명하다가 커밍 스텝의 레오퍼드 재킷을 입은 에디터의 모습을 '짠' 하고 공개하기도 한다.
"언제 출시되나요?", "정확한 소재가 뭐죠?"
모 포털 사이트의 파워 블로거이기도 한 슈퍼 썬은 자신의 블로그와 커밍 스텝 블로그를 연계시켜 방문자 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전에는 고객을 대하는 방식이 다소 일방적이었어요. 오피셜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볼 테면 보라는 식이었죠. 물론 그런 방식이 필요한 브랜드도 있어요. 초고가의 럭셔리 브랜드나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들은 섣불리 고객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신비감이 깨져버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국내에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가 몇이나 될까요?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신생 브랜드들은 보여주는 것에 더해 말도 해야 돼요. 고객과 쌓은 유대감이 없으니 말로라도 그 간극을 메워야죠."
옷 한 벌이 가진 힘이 개인의 지갑을 여는 데 그친다면, 옷을 둘러싼 수많은 담론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일련의 무리를 만들어낸다. 얼마 전에는 베네통 그룹이 출간하는 잡지 컬러스의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