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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평은 왜 예쁘기만 한가?

'텍스트 주의' 칭찬위주 비평, 박수부대 전락한 지식인과 언론
"평론가가 출판사 편집위원 활동하는 시스템 바꿔야" 지적도
"저는 제 말이 좀 논란이 될 줄 알았어요. 사실 기대도 했고요.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하더라고요."

최근 열린 '세계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한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 선생의 말이다. 국내 작가들의 협소한 민족 개념을 지적한 원고를 발표했던 작가는 "국내 사정 모르는 작가가 함부로 말하지 마라"는 비판을 각오했지만, 정작 "선생님 충고,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하는 문인들의 반응이 나오자 어리둥절해 했다.

이는 국내 지식인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비판과 논쟁이 사라진 시대, 모임 자리에는 칭찬과 겸손의 인사만이 오간다. 당파전쟁으로 몸싸움하는 정기국회 시즌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어떤 이념이나 이익 때문에 지식인들이 논쟁하는 사례를 구경하는 건 이제 희한한 일이 됐다.

세미나나 심포지엄 같은 '살 맞대는 자리'에서뿐만이 아니다. 문예지와 인문사회과학잡지에서도 신랄한 논쟁이나 비판 글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이럴 자격 있습니까?

서경식 작가의 미술비평서 <고뇌의 원근법> 서문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왜 내가 본 한국의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의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 여기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이 책은 그럼에도 우리 근대미술이 예쁘게만 표현된 것은 제국주의 시대, 국민국가의 '계몽신민'으로 저항없이 자랐기 때문이며, 일본 미술이 그런 것처럼 한국의 근대미술 역시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한국의 근대미술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국내 어느 문화예술장르에 대입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예술 작품에 박수 치며 '예쁜 비평'을 재생하는 지식인들에 대입해도 말이다.

일례로 문학계를 보자. 갓 등단한 신인작가의 작품집에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등 세계문호의 작품을 닮았다는 띠지가 걸리고 선배, 동료 문인들의 추천사가 책 뒷면을 장식한다. 상찬으로 빚은 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그만그만한 작품을 포장하는 현학적 수사로 쓰인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광고는, 기실 그 문학상이 신인작가의 공모전임에도 작품의 권위를 보장하는 상징 기제로 쓰인다. 칭찬으로 포장된 문학상 심사평은 다시 광고문구로 쓰인다.

고뇌 없는 비평, 예쁜 비평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문학평론가 최강민은 두 번째 평론집 <비공감의 미학>에서 이 배경을 '텍스트 중심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타자였던 <문학과사회>와 1994년 창간한 <문학동네>는 계몽주의적 민족민중문학론을 비판하면서 문학주의를 내건다. 문학주의의 구체적 실천 형태는 일명 텍스트주의로 나타난다. 텍스트 중심주의는 비평에 있어 중요한 것은 메타비평이나 계몽주의적 문학론의 전개가 아니라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를 파악하고 드러내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비공감의 미학> 146페이지)

이런 관점에서 비평가는 작가나 작품보다 항상 두 번째 위치하는 2등급 존재로 격하된다. 텍스트주의의 강조 속에 평론가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후퇴하고, 작품이나 작가의 의미가 기형적으로 도드라지는 형태를 취하게 됐다. 요컨대 90년대 비평계 중심이 된 '텍스트주의'로 인해 평론가들이 담론보다 작품 해설위주로 활동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문과 방송, 인터넷이 쏟아내는 개별적 사실을 '정보'라고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가치관이 개입된 거시적 식견을 '지식'이라 부른다. 지식인들은 말 그대로 시대를 보는 혜안, 지식을 대중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쟁, 민족문학론 등은 모두 당대 주요 출판사의 편집위원, 평론가들에 의해 담론이 형성됐다.

그러나 현재 지식인 집단에서 담론은 고사하고, 비판적 형식의 해설이나 평론을 찾기도 힘들다. 최근 몇 년간 활발하게 진행된 문화예술계 논쟁들은 메이저 출판사 영역 밖에서 이뤄졌으며, 이들 논쟁 역시 '출발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한' 용두사미꼴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일례로 최근 2~3년 사이 일어난 소설 표절 의혹은 모두 문학평론이 아니라, 언론사 투고 혹은 기사 형식으로 제기됐다. 2008년 제기된 조경란의 <혀> 표절 의혹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올해 제기된 권비영의 <덕혜옹주> 표절 의혹은 한겨레신문을 통해 각각 "내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들이 글을 기고하며 촉발됐다.

황석영의 <강남몽>은 월간지 신동아가 자사의 기사를 황석영 작가가 무단 도용했다는 기사를 쓰면서 촉발됐다.

이후 이들 표절 의혹에 대한 몇몇 작가들과 평론가들의 글 또한 모두 언론에 실렸다. 조경란의 작품을 비판한 김곰치의 '이 엽기적인 표절 의혹에 왜 침묵하는가'는 프레시안에, 권비영과 황석영을 비판한 이명원의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는 한겨레신문에 실렸다. 물론 이 두 글은 비평이 아니라 칼럼 형식이었고, 이에 대한 창작자들의 대답은 전무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9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 중 하나인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표절 논란은 1992년 이성욱 평론가가 한길문학을 통해 표절의혹을 제기했고, 논쟁 역시 문예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칭찬 위주 비평, 박수부대로 전락한 지식인과 언론에 대한 비판은 물론 과거에도 있어 왔다. 강준만, 김명인 교수 등이 제기한 이른바 '주례사 비평'이다. 이 말이 등장한 건 2000년대 전후다.

강준만, 김명인, 이명원 등 소장평론가들이 국내 주례사 비평의 문제를 제기하며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파문> 등을 책을 냈고, 2000년대 중반 <작가와비평>, <비평과전망>등 대안적 형식의 잡지들이 창간됐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의 출판업계에서 이들 책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김명인 교수를 필두로 이경수, 정은경, 홍기돈, 고명철 등 소장평론가들이 2007년 결성한 대안적 비평그룹 '포럼X'는 결성 1년이 안 돼 무너졌다.

주례사 비평이란 말은 이제 구문이 됐다. 문학계의 이단아로 꼽히는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는 "비판에 대한 나름대로 반박이 나와야 하는데 피드백이 전혀 없다. 비판을 시도하는 평론가들 스스로 회의적인 입장이 된다. 이제 주례사 비평이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구시대적이란 인상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솔직해지자, 뜨고 싶다고

국내 활동 중인 소장평론가들에게 물었다. 한국의 비평은 왜 예쁘기만 한 건가요?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양학부 교수)는 "평론가들이 칭찬하는 해설만 쓰는 건 아니다. 원로 작가나 비평가의 작품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는 젊은 평론가도 별로 없다.

문제는 메이저 출판사에서 그런 원고를 싣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등을 문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그의 비평 '상업적 성공이 문학적 완성을 보증하는가?'는 문예지가 아니라 인터넷 매체 레디앙에 실렸다. 오창은 평론가는 이어 "작가나 작품의 문제를 지적한 글을 발표해도 반응이 없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주례사 비평이나 문단권력 문제를 상업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재 많은 출판사와 문예지들은 적자를 감수하면서 한국문학에 '올인'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오히려 문단이나 문학 제도 내에서의 상징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2000년대 초반 주례사 비평과 최근의 '예쁜 비평'이 차이를 보인다.

2000년대 초반의 주례사 비평은 상징자본에게 노골적인 찬양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논문 표절을 제기한 글을 발표하고, 당시 문단에서 사장될 뻔한 이명원 문학평론가의 사례, 그로 인해 촉발된 문학권력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최근의 '예쁜 비평'은 새로운 상징자본을 그들 스스로 구축하기 위해 사용되는 듯하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자음과모음>, <세계의문학> 등 주요 문예지 편집위원들이 30~40대 젊은 편집위원으로 교체되며 갓 등단한 20~30대 신인 평론가들도 특집 기획 원고를 쓰는 일이 흔해졌다.

이들은 2000년대 전후 등단한 동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격적으로 옹호하며 함께 문단 내 영향력을 넓혀왔다. 갓 소설집을 묶거나 단편 4~5편을 발표한 작가들의 작품을 토대로 '신세대 문학'을 역시 갓 등단한 2, 3년차 신인 문학평론가들이 좌담회의 형식으로 칭찬하는 기획도 종종 실린다.

비평의 대상에 있어 나이와 연륜은 고려 대상이 아니겠지만, 이들의 대담과 비평이 칭찬 일색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지젝, 랑시에르, 아감벤 등 이제 막 수입, 번역되기 시작한 해외 철학자들의 현학적 개념은 예쁜 비평에 주석으로 달려 마치 그 칭찬이 권위 있는 해설처럼 보이도록 포장된다.

고봉준 평론가는 "비평의 성격변화는 당대성을 장악해야 한다는, 그리고 젊은 작가들에게 올인함으로써 비평이 새로운 문학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비평의 강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몇몇 문예지이고, 그 문예지를 이끌고 있는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이지만, 젊은 평론가들의 욕망 또한 그들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제 '예쁘지 않은' 비평을 볼 수는 없을까? 조영일 문학평론가는 평론가가 출판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시스템을 바꾸라고 제안했다. 국내 문학출판사는 타 영역과 달리 독특한 체제로 운영된다.

문예지로 작가가 신작을 발표하고, 장편의 경우 이를 묶어 출간한다. 단편 소설도 소설가가 발표한 문예지 중 한 권과 계약이 미리 돼 있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들이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연간 수억 원의 적자를 내면서도 문예지를 발간하는 이유는 이 작가들과 단행본을 계약하기 위해서다.

문예지 편집위원은 작가를 섭외하고, 원고를 청탁하고, 특집을 기획하는 역할을 한다. 몇몇 편집위원의 경우, 출판사 단행본 출간을 할 때 입김을 넣기도 한다. 이 편집위원을 국내 문학출판계에서는 문학평론가가 맡고 있다.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작품집에 비판적 비평을 쓰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조영일 평론가는 "일본의 경우 출판사의 전문 편집자가 문예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평론가와 작가에게 원고를 청탁한다. 경영상 문예지 발표를 조건으로 단행본을 계약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없지만, 메이저 출판사 문예지 편집 체제를 출판 전문편집자로 편집위원으로 바꾸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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