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10가지 단상]가기 싫어도 우리는 연어처럼 회귀한다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설 풍경설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명절인가

1. 가족과 조상에 대하여

남자들이 향을 꽂고 절을 하면 여자들이 술과 떡국을 올린다. 차례가 끝나면 남정네들은 음복을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썬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안방에서 밥상을 기다리고, 아이들은 과일과 부침개를 손에 들고 뜯어 먹는다.

상이 차려지고, 삼삼오오 모여 떡국을 먹는다. 말없이 떡국을 씹어도 끝없이 누군가의 말소리는 들린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트로트를 부른다. 떡국과 정종과 연시를 먹고 나면 남자들은 거실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인스턴트 커피를 나눠 마신다.

가족제도가 근대 국민국가의 통치정책이라는 말이 있지만, 설날 아침 떡국 나눠 먹는 풍경 앞에서 이런 말은 다 부질없어진다.

설날 아침 차례상 앞에 모인 가족은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떼를 연상시킨다. '본래 그러한 것이 있고 또 마땅히 그러한 것이 있다'는 퇴계 이황의 말처럼 연어든 사람이든 마땅히 그러한 때가 되면 다시 모인다. 연어는 알을 낳고, 인간은 제삿밥을 나눠 먹는다. 함께 모여 제 존재를 확인하려 드는 것은 생명의 본래 마땅한 성정인가 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처음 부대꼈던 이들과 함께 아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설날은 의미 있는 날이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오늘이 한 해의 시작이오', 인위적으로 빗금 친 날 우리가 가족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유다.
이윤주 기자

2. 고향에 돌아와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정지용 '고향')

정지용은 노스탤지어와 현실의 간극에서 비틀거린다. 그 공간은 고향이다. 정지용의 고향은 태어나 부대끼고 견뎌낸 삶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싶은 심미적 대상이다. 때문에 정지용은 그곳을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부르지만,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렇듯 고향 그리기 노래의 수천 년 전통 속에서 목 메이게 가고 싶은 고향은 구체적 경험의 장소가 아니라 '그렇다고 믿고 싶은' 이상향의 공간이다.

명절을 맞는 우리의 마음 한 자락에도 고향 그리기 판타지가 숨어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 태반을 넘는 2011년에도 여전히 설날이면 미디어는 서울역과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시골의 전원을 차례로 비추며 고향풍경을 재현한다.

어떤 이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지하철이 통과하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변했지만, 이들은 기차 창문 밖을 내다보며 실개천이 흐르는 아득한 고향의 정서와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린다. 그렇다고 믿고 싶은 의지에서, 고향은 아름다운 이상향이 된다.

이 의지를 비웃으면 안 된다. 참으로 바쁜 세상, 한치 앞은 보이지 않고 옆 사람은 전부 경쟁상대로 다가온다. 새해를 맞는 어린이의 마음은 설레지만, 새해를 맞는 어른들의 마음은 불안하다. 고향 찾기는 이 불안한 마음에 희망을 담는 일이다.

설날이다. 아이들의 볼멘소리에도 어른들은 다시, 맹렬하게 기차표를 예매하고 톨게이트를 향해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히겠는가.
이윤주 기자

3. 먹기에 대하여

오징어와 땡초를 넣은 부추전, 돼지고기 두부완자, 김치 녹두 빈대떡, 밤, 대추와 함께 푹 쪄낸 갈비찜, 소고기 무국, 맛살, 고기, 채소가 번갈아 꽂혀진 산적 꼬치, 마지막으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배까지.

어제는 피자, 그제는 족발을 먹고 온 우리로서는 떡 벌어지게 차려온 이 음식들을 다 먹을 수도 없고, 다 먹어서도 안 된다. 사실 처음부터 다 먹을 수 없도록 만든 음식이기도 하다. 만일 식구들이 차려 내온 음식을 싹 비운다면 부엌을 지휘한 큰 어머니는 내년 설 두 배의 음식을 마련할 테니까.

어쨌든 그리하여 남아 돈 음식은 본격적인 여행을 떠난다. 가장 열렬한 수요자는 자취생이다. '딸 도둑' 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그들은 미리 집에 냉동 보관 용기를 사놓는 치밀함을 발휘한다.

비닐 봉지에 차곡차곡 싸서 가방에 챙긴 이 식량들은 먼 훗날 아사 직전의 한 생명을 구하는 데 활용된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을 거절 못하고 들고 온 젊은 부부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몽땅 버리고 가는 바람에 휴지통에 명태전과 호박전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은 최근의 풍경이다. 집에 먹을 사람이 없어서, 입에 안 맞아서, 냉동 식품은 싫어서 등등의 이유로 미련 없이 버려지는 아까운 음식들이여.

구제역이라는 전국적 환란과 이상 기온으로 인해 올해에는 설 음식 장만 비용이 지난해 보다 15.4% 올라, 4인 가족 기준 19만 원 정도가 들어갈 예정이다. 설 음식을 싸주는 주방의 지배자들은 이전보다 세심히 가족들의 면면을 살펴볼 일이다. 어느 놈이 버릴 놈인지, 어느 놈이 잘 먹을 놈인지.
황수현 기자

4. 놀기에 대하여

설날 놀이에는 세대 차이가 존재한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고 시간도 많지만, 어른 청년 아이들의 생각은 다 다르다.

부모, 장성한 아들과 딸, 사위, 며느리들은 담요를 편다. "치매 예방에는 역시 고스톱이야." 판을 벌인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처럼 모인 가족끼리 어디 놀러 갈까 의견이 분분했지만 역시 고스톱이 친목에는 최고다. 분위기는 바로 왁자지껄해진다. "형수님 쌌어요." "아주버님 피박이에요."

거실을 양보한 젊은이들은 영화를 보러 간다. 가족 모두가 보러 가고 싶었지만 세대와 남녀 따라 영화취향이 달라 통일이 안됐다. 영화사들은 설 대목을 겨냥해 가족영화를 줄줄이 내놓지만.

아이들은 방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을 즐긴다.

가끔은 전통놀이도 인기다. 윷놀이는 세대 차를 넘어 누구나 즐겁다. 피자 한 판 쏘기. 한쪽에서는 화투 치는 소리가 경쾌하고, 한쪽에선 윷이 허공을 가른다. 일찌감치 반주에 취한 어른은 방구석에서 코를 곤다.

작년 설도 그랬고 올해도 마찬가지다. 늘 같은 풍경이다. 펜션에 갈까, 온천에 갈까, 놀이공원에 갈까,고궁에 산책을 갈까, 여러 궁리를 해보지만 한 마음이 되기 쉽지 않다. 날도 춥고, 어떤 건 경비도 만만찮게 들고, 취향도 다르고, 집에 돌아갈 시간도 다 다르다. 부모님 집 대문을 나설 때 왠지 조금은 허전하다. 그리고 놀이문화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강은영 기자

5. 무한반복의 '비교체험'

드디어 그날이 다가온다. 누군가에겐 '대목'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상반기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하는 설이 도래한 것이다.

달력의 붉은 숫자가 유독 뭉쳐 있는 지점이 다가오면 사람마다 감정이 복잡해진다. 설레는 사람에겐 이유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세뱃돈 특수를 노리는 꼬마들, 손주를 보고 싶은 할머니, 드디어 취직전선에서 승리했거나 연애에 성공한 선남선녀들은 가족과 친지 상봉에 들뜬다.

설레는 사람이 있다면, 고향 가는 발걸음부터 무거운 사람도 있다.

혈연과 지연이 유난히 발달한 우리 풍토에서 '비교'란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인가. 승진에 실패했거나 타율적으로 명퇴를 한 가장들, 올해도 백수에서 못 벗어난 남녀, 아직도 짝을 못 만난 골드미스, 차림새에서부터 여전히 경제적 궁핍함을 숨길 수 없는 이들. 그들은 겉으론 위안을 내세운 동정의 시선과 '아친아', '엄친딸'의 예정된 공격에 출발 전부터 가슴이 막막하다.

촌수조차 가물가물한 친척이 불현듯 오지랖을 발휘해 내 연애사와 직장사를 걱정할 때, 미취업과 만혼, 승진 실패의 책임은 '장기화된 경제 불황의 여파'로 방어 가능하다. 하지만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해라"라는 후속 공격에는 그저 "네 알았습니다"가 상책이다.

무한반복되는 명절의 '비교체험' 에서 해방되고 싶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언제 내려 올 거니" 라는 부모의 말씀에 이 땅의 필부들은 마법에 걸린 듯 또 다시 그 길을 떠난다..

가족은 서로 보듬어주어야 가족이다. 내 부모 내 새끼니까. '또 그 소리' 이번에는 하지 말자. 정작 힘들고 괴로운 사람은 당사자가 아닌가.
송준호 기자

6. 남녀불평등의 시간

언제부턴가 명절의 단골 뉴스는 단연 '며느리 증후군'이 됐다. 차례상 차림으로 갈등을 겪는 집이 적지 않다. "일 년에 단 두 번뿐"이라고 말하는 남편과 "수십 년 했으면 됐다. 이제 더는 못한다"는 아내가 맞선다. 평소 금실 좋던 부부도 명절만 되면 적이 된다.

"시댁 조상만 조상이냐"라고 따져 물으면 남편들도 할 말을 잃는다. 이렇게 불거진 문제로 요즘은 명절을 전후로 이혼 소송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남편들은 아내들의 갑작스러운 반발이 당황스럽다. 하지만 인고로 인한 아내의 피로감은 그간 입이 아닌 몸이 대신해왔다.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못 본 척했을 뿐이다. .

절대적으로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한 차례상, 그럼에도 차례 의식에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성 차별적 전통. 손님들이 올 때마다 "술상 내와라", "밥상 내가라" 라는 소리. 남편이나 내 편이 되어주면 좋겠는데, 집에선 자상하던 남편도 이상하게 본가에만 오면 권위를 따른다.

우선순위에서 늘 시댁에 밀리는 친정 부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싸아하다. "딸을 낳지 말아야지" 라고속으로 다짐도 해본다.

세월이 흐르며 명절 증후군은 며느리들만의 것도 아닌 게 됐다. 아내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아내를 설득하고 일을 분담해야 하는 남편들도 편치만은 않다. 워킹 우먼의 증가로, 시집살이를 겪었던 시어머니는 이젠 며느리살이까지 하게 됐다.

내 딸도 다른 집에선 며느리이다, 라는 아주 단순한 논리를 생각한다면 조금 사정이 나아질까.

이 땅의 남편들이여, 다들 모여있을 때 진정 잘 해주고 배려해주는 남편이 좋은 남편입니다.
이인선 기자

7. 나를 위한 시간?

직장인들이 신년 달력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공휴일이다. 2011년의 공휴일은 지난해보다 이틀 늘어난 64일. 물론 주5일제를 시행하는 기업이 공식적으로 쉬는 날은 116일에 이른다. 하지만 하루 이틀로 조각난 날은 쌓인 피로를 한 꺼풀 벗겨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직장인들이 명절, 구체적으로 주말이 끼지 않은 명절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설 연휴는 짧게는 5일, 길게는 9일에 이른다. 무엇을 하며 보낼지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긴 설 연휴는 어영부영 지나고 만다. 차례상 혹은 설 음식 만들랴, 먹으랴, 밀린 잠자랴, 가족과 이야기하랴, TV 시청하랴, 시간은 잘도 간다. 연휴 끝자락에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해봐도 소용없다.

설 연휴는 가족을 위한 시간일까, 조상을 위한 시간일까, 나를 위한 시간일까? 과거라면 가족과 조상님을 위한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나'를 위해 투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한 대형 여행사에 따르면 올해 설연휴기간 동안의 해외여행객은 지난해보다 3배나 늘었다.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이미 지난해 말, 따뜻한 동남아로 떠나는 비행기는 대부분 예약이 완료됐다.

명절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킨다며 비난하거나 만연한 개인주의를 한탄해도 소용없다. 시간은 흐르고 명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비단 그 때문만도 아니다. 연간 근무시간 2256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긴 시간 일하는 한국인들.

행복지수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국가와 맞먹는 한국인들에게 간만에 숨통 트이는 금쪽같은 시간이 명절 연휴가 아닌가. 열심히 일한 자, 그들에게 쉴 자격은 충분하다.
이인선 기자

8. 뜯는 자, 뜯기는 자

질문: 저는 이제 곧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2년생 학생입니다. 요즘 돈이 너무 부족한데요. 저의 생각은 세뱃돈을 1999년생, 2000년생 상꼬맹이들과 똑같이 만 원씩 받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답변: 좋은 방법은 그 상꼬맹이들의 돈을 뜯는 겁니다. 그래도 중학교 졸업한다고 하면 20만~3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신산스런 정초 분위기를 훈훈하게 데우는 건 역시 세뱃돈이다. 어른들이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으면 기다렸던 아이들이 그 앞에 쪼르르 선다. 아이들의 눈에 그렁그렁 오른 돈독에 괜시리 어른들이 긴장한다.

"그래, 올해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말이 길어지는 건 제일 나쁜 일이다. 만 원짜리 몇 장 앞에 두고 그런 대업(大業)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날래게 세뱃돈을 받고 나면 그때부터 전쟁은 시작된다. 어린 것들은 쉽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이면 호락호락하지 않다.

쩐의 전쟁에 참여권을 빼앗긴 이들은 유유히 동그랑땡을 먹으며 이 난리통을 감상한다. 바로 세뱃돈의 사각지대에 처한 이들이다. 본인의 취업 시점에서부터 자식들이 취업을 하기까지. 그 중에서도 2세가 태어나는 30대 초반부터, 주변에서 부모님 부음 소식이 들려오기 전인 50대까지는 위로도 아래로도 바랄 것이 없다.

너무나 생산력이 왕성한 이 시기에 처한 남녀는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처럼 그저 정신 없이 뜯기는 것이 의무이자 미덕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푹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지쳤지?' 궁금하다면 호기롭게 외쳐라.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먼 바다에 나갔을 뿐이다."
황수현 기자

9. 보너스 받았습니까?

명절마다 직장인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고, 가장을 개선장군으로 만들며, 시베리아 벌판 저리 가랄 정도로 삭막했던 사무실에 양쯔강 기단을 드리우는 것이 있다. 발음 끝에 입가가 절로 올라가 카메라 앞 '치즈'나 '김치'를 대체해도 좋을 그 은혜로운 단어는 다름 아닌 '보너스'. 보너스의 다른 뜻은 '뜻밖의 즐거움'이다.

보너스는 오랫동안 직장인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해 왔다. 1971년 한 일간지 기사는 보너스가 '샐러리맨의 부푼 꿈'이라고 표현했다.

한 순간이나마 노동의 시름을 씻고 철전지 원수 같던 상사도 예뻐 보이게 하는. 하지만 한 포털 사이트 백과사전의 정의는 냉혹하다. "한국에서 보너스는 저임금을 보충하기 위한 생계비 보조적, 임금후불적 의미가 있다." 조삼모사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런 듯도 싶다. 보너스의 대부분은 밀린 카드값 메우는 데 들어간다. 한국사회에서만 있었던 김장 보너스, 추석 효도비 등은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한 보너스였다.

그러다 보니 보너스를 일종의 시혜로 생각하는 경영자와 보너스를 일종의 권리로 생각하는 노동자 간 동상이몽이 부딪히기도 했다. 80년대 노동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정화진의 '쇳물처럼'에는 김장 보너스를 둘러싼 갈등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보너스는 핑계일 뿐, 문제는 열악한 노동환경이었다.

올해 설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보너스가 절실하다. 입에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못한 대부분의 직장인은 천문학적 고지서가 꿈에 나올 정도로 난방비 걱정에 시달린다. 부모님 댁 보일러 걱정도 예년보다 더하다. 유난히 추운 이 겨울 나느라 보너스 기다리는 마음도 유난히 가난하다.
박우진 기자

10. 미혼과 백수의 설날 풍경

"기막힌 발명 아이템이 있어요."

"갑자기 뭔 발명?"

"귀마개요. 전자 필터가 내장돼 있어서 선택적 히어링이 가능한 귀마개예요. 입력기를 이용해 듣기 싫은 단어를 입력해 넣으면 그 단어는 필터에 걸러져 들리지 않게 되죠. 예를 들면, 노총각, 백수, 취직, 결혼 같은 단어들."

한 웹툰 만화 속 대사다. 제목도 '솔로백수와 설날'. 설날 아침 떡국이 차려진 상다리 앞에서 미혼이자 백수인 아들이 내뱉은 말이다. 실제로 발명할 수 없는 귀마개라면 설날은 차라리 혼자 보내는 게 더 나을 터.

설날에는 두 종류의 인간형이 등장한다. 설날을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과 설날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 그럼 이 설날 기피자들은 누구인가? 대부분이 솔로와 백수다. 더한 경우는 이 두 단어가 모두 붙는 '솔로백수'들이다.

이들은 온 가족이 만나는 것 자체가 싫다. 미혼자들은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백수들은 취직과 직업에 대한 쓴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로까지 위장해 취업을 했던 <방가?방가!> 같은 영화가 나왔는지도. 솔로백수들은 설날임에도 차라리 외로움을 택한다. 혼자 방구석을 지키며 '설날 혼자 보내는 법'을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떡국 한 사발 먹지 않아도 혼자 있다는 것만으로 배가 부를 일이다. 누가 이들에게 설날은 많은 가족들이 모이는 훈훈하고 따뜻한, 정이 오고가는 명절이라고 했나. 혼자 맞는 설날이 더 슬프고, 더 배고픈 이유다.
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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