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욕망 부추기는 사회… 많이 살수록 불편한 삶

이이정은, Somebody else's monument no.2, 2010
"저와 8년간 쇼핑을 함께 한 추억이 있는 친구들인데..."

올해 초 한 여성의 '절교 선언'이 화제가 됐다. 지난 8년간 약 9000만 원어치 옷을 샀다는 '무일푼녀'가 한 케이블TV 채널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신용카드를 잘랐다. 그녀의 눈물과 함께 쇼핑의 추억이 산산조각났다.

구두를 '아가'라고 부르는 한 여성 가수는 그 아가들 때문에 두 번이나 파산 위기에 처했다고 밝혔고, 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유학비용을 쇼핑으로 탕진해 학교를 7년이나 다녀야 했다고 털어 놓았다. "집에선 제가 공부를 무척 좋아한 줄 알아요."

쇼핑중독의 두 얼굴

방청객들이 웃는다. 쇼핑중독 증상은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 소재다. 그만큼 공감도가 높다. 이렇게 예쁘고 독특하고 새로운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 그럴 수도 있지, 싶다. 투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연예인과 패션 업계 종사자의 쇼핑 편력은 그들의 안목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모험담이 길어질수록 시청자의 궁금증도 커진다. 오늘 저 여성 가수가 신은 날렵한 구두는 뭐지? 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위트 있는 재킷은 어느 브랜드지?

당신도 그들처럼 추억을 나눈 '친구'와 '아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카드 연체에 쫓겨 다니는 스릴 있는 쇼핑 생활을 원하는가? 모험은 멀지 않다. 프로그램이 끝난 자리에서 줄줄이 비법이 공개된다. 여성 가수의 촉촉한 피부는 먹는 수분 보충제 덕분이고, 발랄한 입술은 한 화장품 브랜드 립스틱의 공이다.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도, 사면 된다. 친절한 신용카드 광고가 "왜 안돼? Why not?" 이라고 묻는다. 토스트기에 넣은 빵보다 빨리 튀어 나오는 카드론, 방문도 전화도 필요 없는 대부업체의 신용대출서비스가 마련되어 있다. 요즘 이런 '신상' 모르면 "철부지, 애송이"다.

"쇼핑할 때 춤추라"는 흥겨운 음악과 '고객님'을 떠받드는 추임새에 맞춰 모험을 즐기다 보면 신데렐라라도 된 기분이겠지만 마법 풀리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반드시 신용카드 대금과 대출금을 갚아야 할 날짜가 다가온다.

현실은 잔혹하다. 얼마 전 한국심리상담센터 강용 원장에게 한 부부가 찾아 왔다. 아내의 쇼핑중독이 문제였다. 남편 몰래 진 신용카드 빚만 8000만 원. 한도가 초과되자 아예 물건을 훔치기에 이르렀다.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이 오랜만에 창고 문을 열자, 한 번도 쓰지 않은 옷가지와 가전제품이 호랑이 울음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외로움과 불안을 쇼핑으로 달랬던 거죠." 부부는 이혼 직전이다.

문형민, Unknown City 19, 2008
쇼핑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회

쇼핑중독은 현대인의 신종 감기가 됐다. 경제가 바닥이고 실업률은 하늘이라는데도 백화점의 유한마담은 줄지 않고, "기회는 오늘뿐"이라며 종말론 신자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홈쇼핑 채널 쇼호스트들은 오늘도 매진을 달성하고야 만다. 여배우들에게 협찬하는 패션 브랜드의 완판 신화는 이제 하품 나올 정도로 흔하다.

쇼핑중독 바이러스의 진원지는 도처에 있다. 언제부터 백화점 세일은 상설행사가 됐고, 출퇴근길을 가로막는 대형마트와 쇼핑몰의 구애는 집요하다. 인터넷과 IPTV는 구매 결정의 무게 중심을 손가락으로 옮겨 놓았다. 덕분에 택배회사는 늘 비상 상태다.

"중산층 이상 소비자는 다 소비중독이라고 봐요. 필요와 수입을 넘어서는 비합리적인 소비생활이 일반화된 것 같아요. 냉장고가 꽉 차 있는데도 먹을 게 없다며 또 대형마트에 가거나, 마이너스 통장을 필수품처럼 여기는 것만 봐도 그렇죠." 저소득층과 서민층의 재무상담을 해온 에듀머니의 제윤경 이사는 "상당수가 경제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나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집안을 둘러보자. 베란다 구석과 옷장 속, 평소 잘 들여다보지 않는 수납공간 속에 방치된 물건들을 꺼내볼 것. 상당량이 한두 번 시범 가동된 후 영영 처박힌 신세일 것이다.

집안 수리와 가족 건강 진흥의 사명을 띠고 야심차게 입성한 공구 세트와 녹즙기가, 살 빼고 입으려던 시폰 드레스와 특별한 데이트를 위한 메이크업 풀세트가 주인의 무관심에 밀려나 사각지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손에 닿지 않아도 아쉽지 않았다면 본래 필요 없던 물건들이다. 구입 당시의 절박한 심정은 가짜였단 뜻이다.

"함정에 빠진 거죠." 제윤경 이사는 책 <착한 소비의 시작, 굿바이 신용카드>에서 "융단폭격 같은 소비의 유혹이 우리를 불필요와 조작된 욕구에 반응하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재난은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어플루엔자 affluenza'라는 병명이 정착됐다. '풍요로운'이라는 의미의 '어플루언트 affluent'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 influenza'의 합성어로 물질을 추구하고 과소비하는 사회현상을 가리킨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프릴 레인 벤슨은 책 에서 이 현상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지목한다. 첫째, "전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는 것." 경제발전은 이미 오래 전에 기본 욕구를 충족한 소비자에게 새로운 욕망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욕망을 창출하고 소비자를 설득하고 구체적인 상품을 제시하는 광고와 언론, 공장과 신용카드 시스템의 합작 관계는 견고하고 강력하다. 소비자는 '연료'로 동원된다.

둘째, 자신의 생활수준을 판단하는 대중의 비교 기준점이 급격히 변화했다는 것. 대중매체의 발달이 한때 이웃에 불과했던 '뒤지고 싶지 않은 남들'의 의미를 유명인사, 혹은 드라마 주인공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쇼핑을 부추기는 유혹들은 자신 있게 약속한다. 이 물건만 사면 행복해질 거라고, 소비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라고. 그러나 만족은 거품 같다. 금세 또 다른 물건이 탐난다. 아이폰을 샀더니 케이스가 필요하고, DSLR카메라가 배달된 날 밤에는 조명과 삼각대가 꿈에 나온다. 욕망은 연쇄되고 부풀려진다. 이게 다 소비로 먹고 사는 경제환경의 공세 때문이다.

그러니 인정하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합리적 소비자가 아니다. <굿바이 쇼핑>의 저자 주디스 러바인이 지적하듯 경제학이 상정하는 합리적 소비자, "여러 가지 정보와 이기심을 바탕으로 현재의 필요와 욕구 그리고 장기적인 필요와 욕구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어디에 지출할지 결정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학 속에만 있다.

우리가 합리적 소비자가 아니라는 건 최신 <소비자학?>만 들춰봐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소비행동을 면밀히 분석한 이 분야에 따르면 소비자의 구매 결정은 다분히 무의식적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다.

예를 들면 소비자들은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좋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선택의 폭이 넓으면 선택을 포기하고 만다. 한 실험에 따르면 24가지 종류의 잼이 진열된 매대의 구매율은 6가지 종류 잼 매대의 6분의 1 수준이었다. 구글이 사용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페이지 당 보이는 검색 결과를 늘렸을 때 트래픽은 오히려 감소했다.

이런 분석 결과는 쇼핑 환경을 구성하는 데 적용된다. 메가급 쇼핑몰들은 일부러 쇼핑객들이 길을 잃게 만든다. 목표한 물건만 사고 돌아갈 '위험'을 차단하는 것이다. 쇼핑객들은 헤매면서 예기치 못했던 '득템'도 하고, 간식도 먹고, 영화도 본다. 오래 머물수록 쓰는 돈이 늘어난다.

쇼핑의 의미를 복합엔터테인먼트 활동으로 재정의하는 이들 메가급 쇼핑몰은 최근 국내의 소비환경에 급격히 침투하고 있다. 2009년 아시아 최대 규모인 부산 센텀시티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가 생겼고, 올해에는 여의도와 일산, 내년에는 김포에 각각 쇼핑몰이 들어서 소비자를 우왕좌왕하게 만들 계획이다.

소비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에는 신용카드와 대출업도 지지 않는다. 신용카드 회사는 이용 금액과 횟수에 제한을 두어 따져볼수록 득이 되지 않는 할인, 포인트 제도를 내세워 소비자를 포섭한다. 신용카드가 소비자를 용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대출업은 코믹한 TV 광고로 높은 이자율과 위험 부담을 숨긴다.

<대출 권하는 사회>는 이런 소비환경에 정치적 배경까지 있음을 증언한다. 신용카드가 일파만파 퍼진 것은 IMF 직후인 2000년대 초 정부가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하면서부터였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부자되세요" 같은 신용카드 광고 유행어도 이때 생겼다. 9.11 테러 이후 애국을 위한 소비를 강조했던 미국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니며, 우리의 쇼핑도 마리오네트의 춤에 불과할지 모른다. 진짜 내 것이 아닌 소비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삶은 얼마나 귀찮은가. 즐거운 일이라고 강요당했던 쇼핑은 사실 이토록 피곤한 일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리가 중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첫걸음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