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악한 패스트 패션쏟아지는 싸구려 옷에 환경 오염과 소비 중독, 노동 착취 등 부작용

쇼핑백이 터지도록 하나 가득 옷을 사서 매장을 나서던 고객의 발 앞에 티셔츠 한 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멈칫하던 그는 주저하던 것도 잠시, 버려진 옷을 '나 몰라라' 한 채 발길을 재촉했다. 쇼핑백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주울 정도의 가치도 안 되는 옷. 지금 전 지구는 쏟아지는 싸구려 옷더미에 질식 직전이다.

한 철 입고 버리세요

지난해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 회장은 전 브랜드의 SPA화를 지시했다. 처음부터 SPA를 표방하고 나선 스파오와 미쏘 외에도 그룹 내 여성복, 캐주얼, 아동복, 심지어 란제리 부문까지 모조리 SPA 브랜드 론칭 또는 전환을 명한 것이다. 유니클로를 겨냥한 스파오는 2020년까지 13조 규모의 브랜드로, 자라를 목표로 한 미쏘는 10조 브랜드로 키운다는 목표다.

여성복 르샵은 지난 여름에만 800개 스타일을 내놨다. 150평짜리 대형 매장에 30~40종류의 새로운 옷들이 매주 쏟아졌다.

오랫동안 한국 로맨틱 스타일을 대표했던 숲은 지난해 하반기 SPA 전환을 선언한 후 젊은 층을 위한 '숲걸', 어덜트 층을 위한 '숲 러브', 잡화 라인 숲' 액세서리'로 라인을 확장하면서, 소녀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여자들을 잡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국내 SPA 브랜드 중 가장 유망주로 꼽히는 코데즈컴바인은 백화점에 100평 매장을 얻은 걸로도 모자라 올해 안에 주요 상권에 대규모 직영점을 33개까지 열겠다고 밝혔다.

이 대형 매장들에는 연간 1800 종류의 디자인이 폭탄처럼 투하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플라스틱아일랜드, 리스트, 탑걸, TNGT, 베이직하우스 등이 SPA를 표방하며 더 빨리, 더 많이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왜들 이렇게 큰 매장 확보에 열을 올리고 거기에 더 많은 옷을 채우지 못해 안달인 걸까? 물론 천과 빈 매장이 남아 돌아서가 아니라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지난 2006년 유니클로를 시작으로 자라, 망고, 마지막으로 H&M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국내 패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확신에 가까운 예언이 돌았다.

"대기업과 초저가 패션 빼고는 모두 해외 SPA 브랜드에 먹힐 것이다."

상품 회전율이 빨라 패스트 패션이라 불리는 SPA 브랜드의 전략은 박리다매다. Special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의 약자인 SPA는 옷을 기획하고, 만들고, 나르고, 팔고, 재고처리까지 한 기업이 몽땅 한다는 의미로, 이 시스템이 가져다 준 결과는 속도와 저가다.

다른 브랜드가 1년에 4번 새 옷을 출시할 때 이들은 2주에 한 번씩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영감(?)의 원천은 하이패션, 연예인 패션, 길거리 패션 등으로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다.

가장 목 좋은 곳에 대형 매장을 열고 매주 2번씩, 최신 유행하는 옷들을 싼 값에 제깍제깍 갖다 바치니 라이벌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이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도 SPA가 되는 것뿐.

자라가 한국 론칭 3년 만에 매출 1800억 원을 달성하고 유니클로가 3000억 원을 넘으면서 이제 국내 기업 중 상당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초고속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문제는 종착역에 다다르기도 전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많은 옷은 다 누가 입지?

<제 3의 경제학>의 필자 줄리엣 B. 쇼어는 현재 전 세계에 산더미 같이 쌓인 옷들의 정체가 값싼 패스트 패션이라고 지적했다. 저렴한 가격은 필시 노동력 착취를 그 배경으로 한다.

"한국 패션 기업의 소싱처는 중국에서 베트남, 최근 아프리카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때 베트남이 중국을 이은 제 3의 생산기지로 각광받았지만 금세 아프리카로 넘어간 이유가 뭘까요? 베트남은 노동운동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강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별 탈 없이 생산이 이루어진다면 그곳에서는 아마도 공정무역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정재우 교수에 따르면 '싸고 많은' 패션의 해악은 국경을 넘나든다.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버려지는 옷은, 제작 시 들어가는 온갖 화학 처리 물질, 그리고 폐기시 뿜어내는 무한대의 탄소로 전 세계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 문제는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패션계 전반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SPA는 패션 기업이라기보다는 유통 기업에 가깝습니다. 자라의 경우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브랜드이죠. 그 정도의 속도는 완벽한 아웃소싱에 기대지 않고는 나올 수 없어요. 돈은 유통 장사로 벌고 여기에 마케팅 툴로 디자인이 이용될 뿐이죠. SPA를 선언하면서 디자인을 강화한다는 건 사실상 코미디입니다."

독창성이라는 모험은 그만두고 목 좋은 곳에서 크게 벌려 돈을 벌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국내 패션계의 내공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미 봉제, 패턴, 나염 등 패션의 기본기를 이루는 사업들은 모두 중국으로 옮겨가 한국 패션계는 텅텅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은 당연히 소비자의 안목도 떨어뜨린다. '없는 옷 빼고 다 있다'는 것이 SPA 브랜드라지만 한 기업에서 만든 100개의 디자인과 100명의 디자이너가 만든 100개의 디자인은, 그 상상력과 개성의 질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그렇잖아도 '보이는 손'으로 전 세계 트렌드를 쥐락펴락하는 자라와 H&M으로 인해 획일화되고 있는 패션에 또 하나의 손을 보태는 셈이다.

100배로 빨라진 욕망의 전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트 패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이에 저항한 수많은 브랜드들이 바람처럼 스러져갔고 스러져가는 중이다.

"친환경 패션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입니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씨에 따르면 최근 트렌드가 되고 있는 친환경 패션, 이른바 에코 시크(echo-chic)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은 사례가 없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코르셋으로 꼭 졸라맨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향해 비웃는 그리스 여신상이 나오죠. 그때도 친환경 패션과 대량생산된 트렌디한 패션의 대립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여성들도 유행을 탐하고 옷을 탐했습니다. 다만 그때에 비하면 요즘에는 욕망이 생성되는 속도가 100배 정도 빨라졌다는 느낌입니다."

의류 구매가 증가하면서 유행 주기도 단축됐다. 시즌 단위로 제안되던 유행은 몇 개월 단위로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바꾸었고, 이에 소비자들은 매일 새로운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옷을 살 때의 심사숙고나 실제로 구매한 옷을 입는 횟수도 대폭 줄었다.

유행에 뒤처지고 있다는 강박감, 계속해서 다른 옷을 사야 하는 경제적 부담, 새로운 쇼핑 툴을 익히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이미 가지고 있는 옷에 대한 공연한 불만.

백해무익한 것이 소비중독이라 해도, 그러나 악동 같은 인간에게 누가 이 사탕을 빼앗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행복의 역설>에서 유행을 두고 '필수품의 지루함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보편화된 것, 시대에 뒤처진 것을 못 견뎌하는 인간이 그를 내다버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유행이라는 것이다.

"과소비 사회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다면적이고 경박하고 모순적인 면까지 그대로 바라본다. 그들은 고상함을 버리고 오락을 즐기고 일탈을 꿈꾼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참고: '내셔널 SPA 브랜드, 그들의 경쟁력은?' - 월간 <패션채널> 기사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