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연극의 관습 파기, 연극적 허구성을 깨닫게 되는 관객

[문화비평] 연극 <관객모독>, 反 연극이 주는 카타르시스
기존 연극의 관습 파기, 연극적 허구성을 깨닫게 되는 관객

관객의 많은 호응을 받았던 예전의 명작들을 2004 한 해 동안 대학로에서 연이어 재공연 하는, 이른바 ‘연극열전’의 세 번째 작품은 <관객모독>이다. 극단 76단은 이 극을 1978년에 한국 초연한 이후 정기적으로 재 공연 하였으며, 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고 있다. 1978년 신촌 공연에서 단지 관객을 ‘모독’하는 배우들의 낯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 올해 공연에서는 ‘관객’의 존재감과 공연의 반연극적 요소들이 더 강하게 부각되어 다가 온다.

이 극은 이미 이오네스코가 <대머리 여가수>에서 시도한 바 있는, 기존 연극의 관습을 파기하고자 하는 일종의 반(反)연극이다. 극에는 4명의 화자 또는 발화자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대사를 통해 각자 특정한 인물의 성격을 구현하지 않으며, 이들이 하는 말을 통해 어떤 하나의 사건이 구체화되지도 않는다. 흔히 말하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줄거리도, 인물도, 언어도 부재한다. 언어 연극을 자처하는 이 연극은 “언어란 그것이 사용되는 체계 내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적 언어관이나, 프로그램이 언급하듯 “언어가 외부 현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의 세계 그 자체를 보여 준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계승한다. 과연 언어는 언어 외적 사건을 구축하거나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듯 자기관조적 언어를 사용하며 공연 자체의 위상에 대해 언급하는 이 공연에서는 그저 끊임없이 배우들의 말하는 행위만이 이어 질 뿐이다. 무수히 말을 내뱉는 발화 행위에서는 그것이 누구의 입을 빌어 나오건 누구에게 하는 말이건, 우연적이다. 겉으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는 ‘관객’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 연극적 자연스러움의 파기

이처럼 <관객모독>의 말은 말로써 자족하며 언어 외부에 있는 세계를 지칭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말하기’라는 행위는 의사 소통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갖가지 실험을 통한 일상적 언어 관습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뜬금없이 말에 감정을 실어서 어조를 비틀고 과장하거나, 억양을 강조함으로써 부자연스러운 소리를 내거나, 어순을 뒤죽박죽으로 바꾸어 말하거나, 의도적으로 엉뚱한 곳을 띄어서 읽음으로써 말하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지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이 연극은 또한 연극의 특성인 이중성(분신)을 철저하게 부인한다. 연극의 이중성이란 배우와 등장인물의 서로 분신과도 같은 공존, 지금 이곳의 시공간과 극이 환기하는 시공간의 분리할 수 없는 상호공존을 지칭한다. 4명의 화자로 이루어진 배우들은 공연 내내 <관객모독>이라는 이 공연이 어떤 연극적인 사건을 모방하거나, 지금 이곳이 예전의 어떤 시간과 장소를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한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하는 지금 그리고 이곳이 유일한 연극적 시간이자 장소라는 현장성을 강조하고, 그 점에서 이 공연은 퍼포먼스적 성격이 짙다. 사건의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이 공연의 무대에는 단지 4개의 의자가 놓여 있을 뿐, 이렇다 할 소품이나 장치, 특별한 의상도 없다.

이들의 부인 행위는 극중극에 이르면 극도에 이른다. 4명의 화자가 각자 등장 인물의 역할을 하고 무대 감독이 이들의 연기를 지시하면서 연극 만드는 과정을 과장해서 보여 주는 극중극에서 배우들이 힘주어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연극이 지향하는 ‘진실다움’ 또는 ‘그럴듯함’이다. 즉 연극이 허구이면서도 언제나 진실인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이른바 연극적 자연스러움을 파기하는 것이다. 관객은 이들의 극중극을 지켜보면서 흔히 자신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연극적 진실다움이 얼마나 가증스러우며 허구적인가 또는 우스꽝스러운가를 여실히 깨닫는다.

배우들이 관객의 개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이다. 흔히 관객과 무대를 가르는 ‘제4의 벽’은 파기되며 배우와 관객간의 상호성이 요청된다. 무대감독은 관객들의 주문에 따라 배우들에게 연기할 것을 지시하고, 배우들은 능수능란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과제를 즉석에서 수행한다. 그 능란함과 능청스러움은 웃음의 원천을 이룬다. 연극의 허구적 진실다움을 해체하는 즐거움이 이렇듯 즉석에서 관객에게 주어지는 경험은 이 연극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만큼 이 연극은 독특하다. 연극의 관습을 파기하는 이 연극은 기존의 연극이 아니라며 부인하는 행위 그 자체가 사실상 뜻밖에도 가장 연극적인 효과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연극의 상황과 연극언어를 실험하는 반연극이라 하여 배우들이 자주 대사를 더듬는 모습은 옳지 않다. 반연극이자 언어의 연극이니만큼 의도적인 어눌함이 아니라면 연기와 대사는 더욱 매끄러워야 한다.

- 상큼한 모욕적 행위에 후련함 느껴

공연의 말미에서 배우들은 공연의 제목에 걸맞도록 관객에게 모욕을 퍼붓는다. 욕설 행위는 관객을 도발하고 이들을 극의 현장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고안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모든 모욕들(“이 공명정대한 놈들아”)은 때로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 갖가지 모욕들에는 모두 우리 모습의 일부가 담겨 있으며 그런 점에서 욕설행위는 그야말로 ‘공명정대’하다. 급기야 몇몇 관객이 배우들에게 마주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 순간 점잖고 위선적인 우리 관객들은 마치 무슨 카타르시스라도 경험하는 양 웃음을 통해서 후련함을 느끼게 된다. 배우들이 뿌려대는 물뿌리개를 빼앗아 관객은 그들에게 반격을 하기도 하고, 대야로 퍼붓는 물세례 의식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한다. 극 <관객모독>은 관객을 모독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관객을 의식하고, 연극공연이라는 행위 속에 관객의 현존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하는 점에서는 그 어느 연극보다도 관객을 위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때: 2004년 3월4일-4월11일
■ 곳: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 극본: 페터 한트케
■ 연출: 기국서
■ 극단: 극단 76단
■ 출연: 기주봉, 정재진, 주진모, 고수민, 하성광.

입력시간 : 2004-03-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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