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생, 그 일장춘몽에 대해셰익스피어 원작 의 동양적 변용, 13장의 에피소드로 구성

[문화비평] 연극 <환>
권력과 인생, 그 일장춘몽에 대해
셰익스피어 원작 <맥베스>의 동양적 변용, 13장의 에피소드로 구성


뉴욕에 오프-브로드웨이가 있다면 대학로에는 ‘혜화동 1번지’가 있다. 이 이름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공연을 주로 하는 소극장을 가리키기도,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한 연출가 동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1기 동인인 이윤택 김아라 등을 이어, 현재 3기 동인으로 김낙형 박장렬 송형종 양정웅 오유경 이해제가 활약 중이다. 2003년 4월 ‘권력유감’이란 이름으로 이 극장에서 벌어졌던 3기동인 페스티벌의 참가작 <환>(연출 양정웅)이 이번에는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소극장을 열기로 가득 메웠던 공연이 1,100석의 대공연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변모될 것인가?

양정웅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는 그간 관객의 시선을 끄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신체 훈련이 잘 된 배우들의 집단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객원 배우들도 출연하지만, 이 극단의 앙상블과 휼륭히 융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바탕으로 변용되고 각색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맥베스>는 인간의 권력욕에 대한 연극,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욕망의 주체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연극, 권력욕이 부질없고 허망하며 스스로가 자신이 가졌던 욕망의 희생자임을 그 주인공이 쓰라리게 인식하게 되는 연극으로, 권력무상과 인생의 부조리함을 이 보다 더 통렬하게 보여주는 연극도 없을 것이다.

<맥베스>의 각색이 낯선 일은 아니다. 그 중, 이 작품을 패러디한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왕>은 위뷔왕의 권력욕을 극도로 희화화함으로써 초현실주의ㆍ부조리연극을 예고하는 전위연극의 시조가 된 것으로, 연극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또 이오네스코의 <막베뜨>는 세상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맥베스>의 결말과는 달리, 그런 믿음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며 되찾은 질서는 다음 무질서의 출발일 뿐임을 시사함으로써 악의 회귀성과 반복성, 권력욕이 본능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그 결말을 열어 놓았다. 이오네스코는 정통성을 잃은 권력 찬탈 행위가 인간사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며, 인간의 권력욕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모습임을 암시하면서 권력욕의 보편성을 냉소적으로 무대화함으로써 <맥베스>의 현대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양정웅 연출의 <환>은 <맥베스>에 어떤 관점을 새롭게 제시하는 연극이며 어떤 점에서 공연의 의의를 가지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베스>의 문학성과 비극성은 기존의 대사가 상당 부분 삭제된 <환>에서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되, 반면 <환>은 한국적인 대사와 동양적인 시청각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전혀 색다른 시각적 퍼포먼스와 연극성을 보여 준다. <환>은 많은 부분을 <맥베스>에 온전히 기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변용을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화 해 가는 현대 공연예술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환>은 원전의 각 부분이 어떻게 연출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매 순간 새롭게 충족시켜 주는 공연 무대이다.

원전에서 세 마녀가 맥베스와 뱅코에게 예언을 하는 장면, 남자보다 더 강한 권력욕을 보여주는 레이디 맥베스의 끔찍한 독백 장면, 맥베스가 단검의 환영을 보는 장면, 술 취한 문지기 장면, 연회장에서 뱅코의 유령이 나타나는 장면, 맥베스가 왕비의 죽음을 맞이하여 인생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5막 5장의 유명한 독백 부분(“내일 또 내일…”)과 그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 등은 <환>을 <맥베스>와 겹쳐서 읽는 재미와 의외성을 준다.

제목이 시사하듯 <환(幻)>은 <맥베스>의 주제를 ‘인생무상’, ‘인생일장춘몽’으로 요약하며 작품의 중추를 설정한다. 인물의 성격과 전체적 상황은 유사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의상의 선은 일본이나 중국에 가깝다. 프랑스의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를 연상시키는 분장과 색이 느껴지는 의상들, 그리고 신체언어와 춤, 타악 반주 등이 감각적이다. 가면에 가까운 짙은 분장과 동일한 계통의 색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의상, 세련된 무대 디자인과 조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극을 보는 관객에게 순수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새롭게 더해지거나 변형된 부분으로는 극을 여는 진과 묘 두 주인공의 정사장면, 사람들이 뇌물을 바치는 장면, 해왕의 알현 장면, 해왕의 성격을 던컨 왕과는 달리 설정한 것, 해왕의 살해 장면의 가시화, 원전에 없는 왕의 유령을 보는 장면, 묘 부인의 역할, 세 마녀를 궁궐 밖의 용한 무당으로 설정하고 그들을 묘 부인이 찾아가고 또 죽이는 장면, 극의 대단원에서 진 장군와 묘 부인의 동반 자살 등을 들 수 있다.

<환>은 문학에서 잃은 부분을 공연에서 벌충하고 있으며 희곡의 내용보다는 언어와 공연 자체를 즐기게 해 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해왕의 살해 장면이다. 원전에서 권력에 눈 먼 맥베스의 죄를 구성하는 던컨 왕의 살해 장면이 무대 밖에서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붉은 천이 바닥을 온통 뒤덮는 것은 새로운 설정은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매우 효과적이며 붉은 색조는 그 천위에서 앞으로 펼쳐질 장면에 대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해왕과 진 장군 사이의 서로 맞물리지 않는 대화들, 해왕이 입에 물고 아편을 피우는 긴 담배 대의 느릿한 일상성이 긴박한 느낌과 강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세면이라는 일상적 행동이 살해라는 가학적 행동으로 길고 느릿하게 이어지고, 해왕의 웃는지 우는지 모를, 고통과 쾌락이 범벅이 된 듯한 표정과, 그 과정의 길고도 느린 동작이 집중력과 밀도를 높인다.

5막, 무운시와 산문이 섞인 <맥베스>와 달리 <환>은 서장과 종장을 가진 13장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언어의 차원에서 볼 때 <환>은 <맥베스>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다. <환>의 언어는 많은 부분 일상어로 대체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의고적 색채를 띤 어법을 사용한다. 주문에 가까운 언어들은 의미전달보다는 극의 제의적 분위기를 위해 사용되며, 구음과 방울소리, 북소리 등은 극의 동양적 색채를 강화한다. 더욱이 요즘 같은 권력 쟁투의 시기, <맥베스>를 동양적으로 변용한 <환>의 새로운 무대와 해석이 큰 기대를 갖게 한다.


■ 때: 2004년 3월19일-26일
■ 곳: 엘지아트센터
■ 원작: 셰익스피어 각색/연출:
■ 양정웅 극단: 극단 ‘여행자’
■ 출연: 정해균, 김은희, 최일화, 정규수, 장영남 외.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4-03-24 22:41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