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서정에 잠긴 옛 고을고택·석송령·용문사 등 불교와 유교문화의 고장

[주말이 즐겁다] 경북 예천
만추의 서정에 잠긴 옛 고을
고택·석송령·용문사 등 불교와 유교문화의 고장


“아빠, 이 소나무는 왜 유명해요?”

“사람처럼 세금을 내기 때문이란다. 재산도 많이 갖고 있지.”

국궁(國弓)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경북 예천은 불교와 유교 문화유산이 풍부한 고을이다. 예천 양반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천 권씨 집안에서 남긴 건축물과 보물급 저작물이 있고, 불교문화유산으론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경 전용 책꽂이와 목탱화가 있는 용문사가 터를 잡고 있다. 거기서 우선 눈길을 끄는 건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입구에 서있는 소나무, 곧 석송령(石松靈)이다.

- 인격을 부여받고 세금까지 내는 소나무

석송령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 마을의 안녕과 단합을 지켜주는 동신목(洞神木)이면서 총 5,087㎡에 이르는 전답을 가지고 있으며 현금도 500여만 원이나 지니고 있는 ‘부자’ 소나무다. 게다가 인간처럼 매년 8,850원의 종합토지세를 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600년쯤 전 풍기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 한 그루를 지나던 사람이 건져 올려 이곳에 심었다 한다. 그 뒤 마을 사람이 ‘석평마을의 영험한 소나무’란 뜻으로 이름을 석송령으로 지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토지를 이 나무에게 상속하고 등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석송령을 보고나와 예천읍을 거쳐 용문면으로 들어서면 금곡천을 끼고 제법 널따란 들판을 거느린 마을들을 만난다. 그중 예천권씨종택(중요민속자료 제210호)이 자리한 죽림리 마을 주변은 백두대간 가까운 산촌답지 않게 적당히 풍요롭다.

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조부가 지은 별당(보물 제457호)과 권문해가 지은 안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품격이 잘 드러나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보존 상태도 좋아 조선 중기 건축의 구조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곳엔 권문해의 <초간일기> 등 보물급 저작들도 많이 보관되어 있다.

풍수가들은 반달 모양의 주산은 낮은 구릉을 이루며 마을을 받쳐주고, 청룡인 매봉산과 백호인 백마산이 좌우를 감싸 안은 명당이라 평한다. 장원급제하는 학자가 나와 번창할 땅이라는 것이다. 조부가 집터를 잡을 때 일부러 만석꾼터가 아닌 학자터를 알아보고 잡았다는데, 여기서 만석지기 부자보다 공부하는 학자를 더 쳐주었던 영남 선비문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권씨종택에서 다시 지방도로 빠져 나와 금곡천을 끼고 조금 달리면 초간정이 나온다. 백두대간의 지맥인 사부령에서 발원한 물이 고만고만한 논밭을 만들며 흐르다 문득 90도로 꺾이는 물돌이동 안쪽 아담한 벼랑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누정 많은 영남권에서 이토록 아기자기 하면서 정감 넘치는 정자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날, 개울과 어우러진 정자의 푸른 솔숲을 거닐기도 하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노란 낙엽을 밟는 재미가 쏠쏠하다.

-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보물인 용문사 윤장대

용문사(龍門寺)는 초간정에서 승용차로 5분이면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지척이다. 예천 출신의 두운대사가 870년에 창건했다는 이 절집은 불교 전경신앙(轉經信仰)의 표본이 되는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로 유명하다. 윤장대는 장경(藏經)을 돌리(輪)는 대(臺)라는 뜻으로 회전식 불경보관대다. 이 윤장대는 마루바닥에 8각을 뚫고 축을 세워 천장에 고정시켜 놓고, 그 축을 중심으로 보궁(寶宮)을 축소한 듯한 작은 팔각형 회전 전당을 만들었다.

크기는 높이 4.2m, 둘레 3.2m이며 삼존불이 좌정한 양쪽으로 하나씩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또 8정도를 의미하는 8각의 각 면마다 문을 만들어 경전을 넣고 여닫을 수 있게 했고, 문에는 화려한 꽃살무늬 장식을 했다. 빽빽한 공포(拱包)를 올려 지붕 처마를 아름답게 꾸며서 서고(書庫) 전각 같은 모형이다. 다른 불교국가에도 이처럼 완전한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보물에 속한다.

용문사엔 이외에도 맞배기와지붕의 균형미가 빼어나 보물로 지정된 대장전(보물 제145호), 대추나무로 불상을 조각한 목불좌상 및 목각탱(보물 제989호), 조선 세조가 1457년에 경상감사에게 ‘절을 잘 보호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며 내린 친필 수결인 용문사교지(보물 제729호) 등의 보물이 있다.

▲ 교통: 중앙고속도로 영주IC로 나와 28번 국도를 타고 하리면의 석송령을 들른 다음 다시 28번 국도를 탄다. 이후 예천읍→928번 지방도→예천권씨종택→초간정→용문사를 순서대로 들른다.
▲ 숙식 : 초간정이나 용문사 근처엔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은 편이다. 예천 읍내에 모텔과 여관 등 숙박시설이 많다.
예천의 별미는 청포묵. 읍내 남본리의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054-655-0264)’이 유명하다. 예전에 영남 선비는 하늘거리는 청포묵을 젓가락으로 들어 입까지 가져가는 동안 도포자락에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아야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청포묵무침 한 그릇에 된장찌개, 생선구이, 젓갈, 도라지무침 등 10여 가지에 반찬을 곁들인 청포정식이 6,000원. 또 옥색의 청포묵을 곱게 채치듯 썰어 달걀지단과 당근 등으로 맛깔스럽게 꾸미고, 참기름과 양념장을 얹어 먹는 탕평채는 한 접시에 13,000원.



**'이 땅에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 저자

민병준 여행 작가


입력시간 : 2004-11-03 13:24


민병준 여행 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