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어서 아름다운 '순수의 메시지'한국영화의 '웰 메이드'관행에 무언의 문제제기아마추어리즘의 값진 승리

[시네마 타운] 저예산 독립영화 <철수♡영희>
설익어서 아름다운 '순수의 메시지'
한국영화의 '웰 메이드'관행에 무언의 문제제기
아마추어리즘의 값진 승리


‘철수♡영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등장하는 단짝 친구 철수와 영희를 일약 영화 주인공으로 등극시켰다. 난데없이 튀어 나온 유치찬란한 제목의 이 소품은 제목만으로 폄하할 수 없는 연출자의 야무진 손맛을 느끼게 하는 수준작이다.

서울에서 전학 온 예쁜 여자 아이 영희(전하은)와 짝꿍이 된 철수(박태영)는 선생도, 부모도 손을 든 천하의 개구쟁이다. 사고 뭉치 철수가 영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에피소드와 아이들의 천진한 심성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철수♡영희’의 중심 축을 이룬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예상 가능한 사건들, 예컨대 반장 선거에서 가정 환경의 차이로 인한 급우들 사이의 갈등, 이성 친구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쟁탈전까지 <철수♡영희>는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는다.

세련을 거부한 아마추어리즘
복고는 삶이 고단하고 비루한 시대에 유행하는 트렌드이다. 아련한 유년기의 기억들, 순수했던 시절의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영화들이 사랑을 받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성장통을 다루는 <철수♡영희>는 결코 사는 게 행복하지 않았던 시대의 어른들에게 과거를 추억하게 한다.

서울서 전학 온 천사 같은 소녀를 짝사랑하는 시골 소년 철수의 설렘, 동네 레코드 가게 청년을 흠모하게 된 소녀 영희의 귀여운 열병, 조실부모하고 연로한 할머니 슬하에서 꿋꿋하게 자라는 영희의 건강함 등이 요란 떨지 않는 화면 속에 묘사되는 것이다.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날 것 그대로의 ‘생활의 느낌’을 잡아낸 솜씨는 여느 한국 영화의 인위적인 연출과 뚜렷하게 차별되는 지점이다.

스탭들의 식사비 마련도 빠듯했던 3억원의 초저예산 독립 영화라는 한계를 딛고 완성한 영화지만, <철수♡영희>에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필부들의 삶에 보내는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진다. 의무 출연이라는 희한한 명칭으로 카메오 출연하는 배우 정진영 말고는 이렇다 할 스타가 없으며, 현지 캐스팅 한 낯선 아역 배우들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끌고 나간다.

주연을 맡은 박태영, 전하은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역 배우는 영화의 무대가 된 대전 대덕초등학교 학생들을 현지 캐스팅 했으며, 그들의 가족이 조연으로 출연한다. <철수♡영희>의 매력은 바로 이 아마추어들의 꾸밈없는 자기 표현에서 나온다. 비직업 배우들의 설익은 연기와 어색한 말투가 처음에는 생경하지만 나중에는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게 하는 기이한 매력이 있다.

“버스를 놓쳐 시간 때우기 위해 오디션에 응시했다”고 말한 철수 역의 박태영은 아마추어 배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천연 무공해 연기로 풋풋한 웃음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의 연기는 일반적인 영화 연기의 틀에서 보자면 어색하지만 스크린으로 보기에 한 없이 자연스럽다. 그는 현실과 영화를 굳이 구분하려들지 않는 표정과 어투, 제스처, 동작 등 배우로서가 아니라 실제 초등학교 학생으로서 스크린 안에 살아있다.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이 소년의 꾸밈없는 연기에서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럴듯함을 꾸며내는 프로들의 가식을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대작주의에 물든 충무로에 울리는 경종
세속의 욕심을 버린듯한 투박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철수♡영희’는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는 한국영화 제작 방식에 대해서 무언의 문제 제기를 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 스타의 이름값, 만사에 완벽을 기하는 ‘웰메이드’ 영화가 대접 받는 충무로 풍토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영화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실속 없이 덩치만 키우는 충무로 제작 풍토에 가하는 일격이 숨어 있다. 대작주의에 경도된 한국 영화계가 까맣게 잊고 있는 소박한 진심이 ‘철수♡영희’에는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집념의 승부사인 황규덕 감독의 노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9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이하 ‘꼴찌’)로 데뷔해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1991)에 이어, 무려 1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황규덕 감독은 또 다시 ‘학교 영화’를 컴백 작으로 삼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한국 영화의 관행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지만 저예산 독립 영화 정신을 잃지 않은 황규덕의 영화는 더 소박하고 단출해졌다. 하지만 ‘꼴찌’의 초등학생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영화에는 그 조촐한 규모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잊혀진 감독인 황규덕은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을 보편적인 이야기를 통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80년대 고등학교 교육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낸 ‘꼴찌’에서도 황규덕 감독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성공으로 촉발된 당시 유행한 하이틴 영화의 관습을 모두 배반하는 파격의 이야기를 선보였다. 아마추어 배우들, 인위성을 배제한 연기, 교육 문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 등이 ‘꼴찌’에는 있었다.

‘철수♡영희’는 이 땅의 모든 철수와 영희들을 위한 영화다. 인상적인 것은, 황규덕 감독이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거나 그들의 생각을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조적인 설교를 늘어 놓거나 억지 감동, 드라마틱한 결론을 끌어내는데 관심이 없는 듯한 이 영화는 그저 아이들의 무구한 모습을 담담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황규덕 감독은 아이에게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통과 의례를, 어른에게는 천진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철수♡영희’는 모든 언론들이 시대 변화와 세대 차이를 들먹이며 과거와 달라졌다고만 떠들었던 21세기의 아이들로부터(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실제 아이들이라는 걸 상기해보라) 어른들도 겪었음직한 어린 시절의 보편적인 경험을 끌어낸다. 나이로 세대를 가르려는 ‘분열의 시대’에서 이는 되새길만한 화합의 메시지를 남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1-12 15:15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