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진 숲그늘 지나면그윽한 차향이 발길 붙잡네신록으로 뒤덮히는 남도, 산 정상에 서면 다도해 장관
[주말이 즐겁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동백꽃 진 숲그늘 지나면 그윽한 차향이 발길 붙잡네 신록으로 뒤덮히는 남도, 산 정상에 서면 다도해 장관
지독한 꽃샘 추위 탓에 봄의 발걸음이 굼뜨기만 하더니 몇 번의 봄비로 온갖 봄 꽃들이 피었다가 곧 스러진다. 이즈음 남도 산하는 연둣빛 신록과 여름의 초록 사이를 지나는 중이다. 동백과 더불어 남도의 겨울을 푸르게 지탱하던 찻잎도 이 무렵이면 눈에 띄게 진녹색으로 변해간다. 반도 땅 끝, 해남 두륜산(703m) 기슭에 자리잡은 대흥사와 일지암에서 그윽한 차향을 맡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시기다.
서산대사의 숨결 어린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면 푸른 숲 그늘에 수십 기의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 밭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의 부도도 있다. 경내에 들어 해탈문 우측으로 걷다 보면 맑은 무염지를 지나 은은한 차향이 느껴지는 동다실에 이른다. 어느 때든지 문을 열고 들어가도 좋은 찻집. 기왕이면 일지암에 다녀온 뒤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근처에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서산대사의 금란가사,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승군다표지물 등 많은 유물들이 갖춰져 있는 서산관, 초의선사의 차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초의관 등이 있다. 신라 말기에 세워진 대흥사는 처음엔 한반도 서남녘 해안의 자그마한 절 집이었지만 조선시대 서산대사로 인해 당대 최고 가람으로 거듭났다.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1,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기 전 제자인 사명당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했다. 서산대사 입적 후 제자들은 유언을 따랐고, 구국의 영웅을 모신 이 가람은 그 후 크게 일어나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했다.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대사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해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했다. 정조대왕이 표충사라 사액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추사 김정희의 필치로 새겨진 현판, 이광사의 글씨, 다성(茶聖)이라 일컫는 초의선사(草衣禪師) 동상 등 도량의 태깔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들이 즐비하다. 표충사 앞에는 편안한 표정으로 단지를 들고 앉아있는 노스님의 동상이 있으니 바로 초의선사다. 무안에서 태어나 16세에 출가한 후 40여 년간 두륜산 일지암에서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었던 초의선사는 시(詩) 글(書) 그림(畵)에 능통한 명인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다성(茶聖)이었다. 깊어 가는 봄볕을 받으며 일지암으로 향한다. 길섶의 동백꽃은 어느새 모두 떨어져 푸른빛만 가득한 숲을 얼마쯤 걸으면 어느새 차향이 그윽하게 풍겨오는 일지암(一枝菴)이다. 한 개의 나뭇가지로 지은 암자.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만 살아도 마음이 편하다”(安身在一枝)는 한산시(寒山詩)의 일지(一枝)를 따온 것이다. 곧 ‘일지’는 허름한 초가에서 차와 더불어 평생을 지내면서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스님의 ‘초의(草衣)’라는 법호와 맞닿는다.
초의선사가 40여 년 머물던 일지암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찻잎을 따는 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精)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일 때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실함과 신령함이 어우러진다. 이에 이르면 다도는 다하였다고 할 것이다”고 했다. 일지암 뒤꼍 동백나무 우거진 산등성이에서 흘러나오는 유천(乳泉)은 ‘물은 차의 몸’이라는 점을 강조하던 초의선사가 칭찬한 샘물이다. 선사가 자랑해 마지 않았던 맑은 유천을 한 모금 들이키고 돌아보면 아름드리 동백나무 몇 그루와 푸른 차밭의 풍경이 더욱 싱그럽다. 초의선사도 이 풍경을 사랑했을 것이니, 비록 차 한 잔 권하는 스님 없어도 마음은 더 없이 한갓지다.
입력시간 : 2005-04-2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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