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한이 된 엄마, 세상을 향해 칼끝을 겨누다

[시네마타운] 방은진 감독 <오로라 공주>
냉혈한이 된 엄마, 세상을 향해 칼끝을 겨누다

오로라 공주는 80년대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TV 만화 ‘별나라 손오공’에서 삼장법사를 대신해 손오공 일행을 이끌고 다녔던 여주인공이다.

가는 팔과 다리, 하늘거리는 몸매와 달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세 남자를 종 부리듯 거느렸던 보무도 당당했던 공주. 그 공주가 연쇄살인범으로 돌변해 돌아온다면?

<오로라 공주>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만화 속 여주인공에서 연쇄살인범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공주'의 이야기다.

그녀 앞에만 서면 천하의 손오공도 오금을 펴지 못했던 오로라 공주는 목표로 삼은 살해 대상들을 능숙하게 요리하는 냉혈한 살인자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오로라 공주>는 피해자들의 관계를 파악하기 힘든 연쇄 살인 사건을 쫓아간다. 극장가에서 절찬리 상영 중인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새침하고 귀여운 정신과 여의사 역으로 분한 엄정화가 가련한 살인마 역을 맡았고, 스크린 보다 TV 뉴스를 통해 볼 일이 더 많았던 문성근의 연기 복귀, 여배우 출신 감독 방은진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 등에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영화 외적인 화제거리 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바랄 방은진 감독에게 <오로라 공주>는 성공적인 데뷔작이다.

역발상의 스릴러

역발상의 스릴러 유년기 만화에 대한 추억이 없더라도 <오로라 공주>는 빠져들어서 볼 수 있는 영화다. 기괴하고 끔찍한 살인 수법과 애틋한 모성의 드라마가 전체를 채운다. 백화점 화장실에서 젊은 여자가 흉기로 처참하게 살해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목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오 형사(문성근)가 이 사건 수사를 맡은 뒤 얼마 되지 않아 강남의 한 피부 관리실, 웨딩 숍, 미사리 조정 경기장 등에서 연속적으로 살인이 벌어진다.

공통점은 석고, 비닐, 가위 등 조잡한 장비를 사용하고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현장에 남긴다는 것. 오 형사는 백화점 CCTV 화면에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킨 살인범이 자신과 이혼한 전처 정순정(엄정화)이라는 걸 직감한다.

예고라도 하듯 순정은 현장에 단서를 남기고 오 형사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사건으로 끌어들인다. 연쇄 살인 스릴러의 불문율은 범인을 꼭꼭 숨기는 것이다.

연속 살인의 배후를 쫓는 거반의 영화들이 범인의 정체를 클라이맥스나 결말부에 가서야 밝힌다. 초장부터 범인이 누구인가를 누설하고 나면 이어지는 살인 게임을 쫓아갈 흥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라 공주>는 이 장르의 불문율을 깬다. 누가 범인인가는 시작하자마자 폭로되고 그것도 모자라 살인자의 시점으로 끝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는 역발상을 시도한다.

뭘 믿고 이런 만용을 부리는가. 영화가 자신만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누가 죽이는가’를 쉽게 알려주지만 ‘왜, 누구를, 언제까지 죽일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즉답을 주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비결이다.

군불을 지피듯 서서히 살인자의 정체를 드러내는 스릴러 장르의 법칙을 대신하는 것은 연쇄살인자의 ‘캐릭터’다.

방은진 감독은 키를 쥐고 있는 살인자를 처음부터 노출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면서 살인자의 심리에 동조해가도록 만든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그 여자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관객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독은 살인자에 대한 동일화와 측은지심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하다.

감독 방은진에 거는 기대

방은진 감독은 수년 煥壙?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왔다. 서울예술대학 영화과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는 김진한 감독의 <장롱>이라는 단편영화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영화 현장의 이모저모를 익혔고 기획과 각색 작업에 참여해 감독 수업을 받았다.

2001년 어머니와 딸의 사랑을 다룬 <첼로>라는 시나리오로 데뷔전을 치를 뻔했으나 제작 상황이 여의치 않아 중도하차 한 뒤, 영화 출연을 자제해가면서까지 몰두했던 작품이 <오로라 공주>였다.

‘딸에 대한 지극한 모성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로라 공주>에는 영화화되지 못한 <첼로>의 영향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캐릭터에 대한 강력한 동일화, 유려한 카메라와 편집, ?? 강간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복수극이라는 점에서는 박찬욱 영화의 영향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가 자신의 스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에 비해 이 영화에서 엄정화는 놀랍게 표변한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엄정화의 주술적 연기는 딸을 잃은 상실감과 들끓는 복수심으로 어쩔 줄 모르는 정순정의 모성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여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전제를 지우고 에누리 없이 판단해 보아도 <오로라 공주>는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다.

드라마의 긴장을 이어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도 괜찮고 화면의 밀도와 편집, 음악 등 영화적 표현력도 수준급이다.

영화판에 이름 석자를 알리는 데 급급해 서둘러 데뷔하는 신인감독과 달리,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점이 더욱 고무적이다.

<오로라 공주>는 점점 냉혹해져 가는 세상의 ‘동정없음’이 어떤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환기시키려 한다.

합리와 효율을 가장한 인간의 이기에 병든 세상의 황폐한 풍경을 그려낸다. ‘사소하지만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돌보지 않은 인간’을 향한 그의 발언은 진지하며 열정적이다.

재능있는 배우 방은진은 카메라 뒤에 숨었지만 감독으로서의 그에 대해 또 다른 기대를 걸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10-25 14:01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