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수전 공중전

소설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체험과 창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창작이 직업인 사람, 특히 소설가의 경우 ‘체험’이란 말 그대로 ‘장사밑천’이다.

많든 적든 간에 장사에는 반드시 밑천이 필요한 것처럼, ‘꾸며낸 이야기(픽션)’란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체험은 그대로이든 또 뼈와 살을 붙여서든 소설 속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큼 집어넣는가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작 소설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백 퍼센트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는 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신만이 아실 일인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누구보다도 생생히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의 소설을 썼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소설 속에 담아내어 ‘전쟁문학’의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백경>으로 유명한 소설가 허먼 멜빌 역시 실제 선원이었던 자신의 이력을 소설을 통해 드러냈다. 작가는 포경선의 선원으로 남태평양을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흰 고래를 쫓는 한 인간의 광기어린 집념과 거친 선상 생활에서의 모험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물론 밑천이 두둑할수록 장사에 성공할 확률은 높아진다. 보고 듣고 겪은 것이 많은 작가라면 재미있게 풀어낼 이야기꺼리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두둑한 밑천이 성공적인 장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듯이,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소설을 쓸 수 있고, 또 잘 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체험과 창작’의 함수 관계는 얼핏 비례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그것은 굉장히 복잡 미묘한 문제다.

영화로 만들어져 더욱 유명해진 소설 <반지의 제왕>은 그야말로 완벽한 허구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영국의 작가 J. R. 톨킨이 만들어낸 그 방대한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작가 개인의 실질적인 체험을 짐작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작가가 직접 전쟁을 겪어야만 전쟁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남자인 작가가 임신과 출산의 경험을 소설 속에서 여자 화자의 입장으로 묘사한다면? 연쇄살인범의 생애를 소설로 형상화 시키려면 작가는 어떠한 경험들을 해야 하는가?

문제는 ‘그 작가가 무슨 경험을 했는가’라기 보다는 ‘그 경험이 그 작가에게 무슨 의미가 되었나’인 것이다.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한 인간은 어떠한 경험으로 인해 그 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는가’ 혹은 ‘왜 같은 경험을 해도 인간은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가’라는 관점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알드 달의 원작을 영화화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로알드 달(1916~1990)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마틸다> 등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동화로 유명한 아동문학가이자 ‘반전과 블랙 유머의 귀재’,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등으로 불리는 영국 출신의 소설가다.

그는 작가 인생 전반부의 15년 간 줄곧 기발하고 재미있는 단편들을 발표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결혼해 가정을 꾸린 뒤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어줄 동화를 자신의 손으로 써 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동화 창작을 시작하여 말년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로알드 달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했을 뿐 소설가를 꿈꾸던 소년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석유회사에서 근무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로알드 달은 영국 공군에 지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종사 생활을 마친 뒤 우연히 기고한 글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나는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특이한 이력은 그가 ‘장사밑천’이 두둑한 작가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전투기를 조종하던 중 격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산전수전’을 넘어 ‘공중전’까지 겪은 화려한 경험의 소유자다.

그런데 우리는 전투기 조종사였던 또 한 명의 작가를 알고 있다. 바로 <어린 왕자>의 생 텍쥐베리다. 프랑스인이었던 그 역시 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이 그의 여러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로알드 달과 생 텍쥐베리. ‘불시착 경험이 있는 2차 대전 전투기 조종사 출신’ 작가라는 그야말로 특이하면서도 공통된 체험을 가지고 있는 그 둘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개성이 각기 다른 작가들이다.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슨 체험을, 얼마나 희한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닌 것이다. 그 체험을 자기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는가, 그것이 자기 안에서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어쨌든 ‘체험과 창작’의 관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명 신비하기까지 한 일이다.

로알드 달의 <맛>은 한 마디로 그가 확실한 ‘프로’임을 보여주는 단편 걸작집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가적 솜씨로 자신이 ‘이야기의 귀재’임을 마음껏 뽐낸다.

이 책에 실려 있는 10편의 단편들은 하나 같이 추악하고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이중성을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포장하여 말 그대로 ‘맛깔스럽게’ 독자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또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쇼킹한 결말과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극적 반전 역시 확실한 ‘재미’를 원하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각 소설에 등장하는 거만한 플레이보이, 허풍선이 가구상, 탐욕스러운 미식가, 광적인 내기꾼 등의 모습은 작가 로알드 달이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낸 인물인지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래저래 작가 로알드 달이 ‘선수’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