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

여기 ‘파란만장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 있다.

정수일 - 그는 일제 강점기 연변에서 가난한 유민(流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변고급중학교를 거쳐 이민족의 신분으로 중국 최고의 수재들만이 모인다는 북경대학에 입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중국의 국비유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중국 외교부 및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이러한 그의 이력은 중국 사회에서 엘리트로서의 삶이 평생 보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던 해, 정수일은 북한으로의 ‘환국(還國)’을 선택한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신이 가진 지식과 역량을 자신의 민족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는 소신에서였다.

그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고향은 북한의 함경도였고, 당시 남한과 중국은 적국(敵國) 관계였다.

정수일은 이후 15년간 평양 국제관계대학과 외국어대학 동방학부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다시 10년 남짓 튀니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지의 대학에서 ‘이슬람 전문가’로 연구 활동을 계속한다.

1984년 그는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외국인으로 남한의 서울로 들어온다.

그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 여성과 결혼을 했고, 단국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며 한반도의 고대문명과 아시아와 이슬람간의 문명교류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던 1996년,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그가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외국인이 아닌, 정수일이란 이름의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세간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하마드 깐수, 아니 정수일은 고정 간첩 혐의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는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르고 완벽하게 아랍어를 구사하는 그가 외국인이 아닐 거라는 의심은 체포되던 순간까지 그의 아내조차 해 본 적이 없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기막힌 사연은 그저 흥밋거리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는 분명히 또 충분히 비극적인 것이었다.

중국에서 전도유망한 엘리트로 총망 받던 한 젊은이가 수십 년이 흐른 뒤, 둘로 갈라진 조국에서 외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간첩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다는 것 -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일제의 식민 수탈을 피해 중국 연변으로 흘러든 조선 유민의 후예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운명과 기구한 처지는 바로 근현대사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파란만장한 운명과 기구한 처지를 그대로 응축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수일은 우선 학자였다, 지식인이었다. 그는 채 한 평이 되지 않는 감옥의 독방에서 수의(囚衣)를 입은 채 꿋꿋하게 학자의 임무에 매진한다.

오욕과 모순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소명(召命)에 따라 지성의 양식(良識)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자신의 삶의 지침을 실천하는 것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수의 신분이 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아닌, 그때까지 자신이 피땀 흘려 일궈온 학문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연구 분야는 그때까지만 해도 불모지나 다름없던 ‘문명교류학’이었고,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였다.

그는 감옥에서 그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게,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자신을 져버리지 않은 아내에게 참회와 사랑의 편지를 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더욱 더 학문에 몰두하는 길뿐임을 정수일은 아내에게 띄우는 편지를 통해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나는 결코 세월을 허망하게 소일할 수 없소. 일각을 천금으로 여기고 더욱 분발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운명이고 내가 치러야 할 몫이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이러한 신념과 실천으로 줄기차게 나 자신의 재발견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그래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바로 이러한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우리는 이제 충격과 비탄에서의 허둥거림을 그만두고 황소처럼 묵직하고 침착하게 앞만 내다보면서 걸어 나가야 할 것이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 느긋할 수밖에 없는 옥방에서 자칫 게으름을 예방하고 무언가 이루어내는 방도는 오로지 우직하게 우보천리(牛步千里)하는 것밖에 없소. 잔꾀에 한눈팔지 않고 속성(速成)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쉼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소.”

그는 초인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5년간의 감옥 생활에서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연구 초고를 완성한다. 학문에 대한 그의 숭고한 열정은 정치적 이념과 비극의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 12개 국어(동양어 7개 국어, 서양어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여러 고대 언어를 새로 익히고, 모국어로 책을 쓰는 사람의 자세라며 매일 아침 첫 일과로 433일간에 걸쳐 총 2,349쪽에 달하는 ‘국어대사전’을 완독한다.

전혀 냉난방이 되지 않는 감옥의 독방에서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싸워가며 그는 황소와 같은 우직함으로 자신의 학문적 소망인 ‘실크로드학’의 기초를 닦는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무릎 위에 큰 책을 올려놓고, 그것도 여의치 않자 물을 담는 양동이 엎어놓고 그 위에서 글을 쓰다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 하나를 얻고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그 소식을 아내에게 전하는 이 진실된 지식인의 모습에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연변 조선족 노동자로 서울에 들어와 있던 동생과 감옥에서 해후하는 장면에 가슴이 시려오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정수일은 당연히, 여전히 진정한 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소걸음으로 천리, 만리를 가고 있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