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가 없는 어디에서 그녀들은

일찍이 시를 쓰겠다던, 문학을 하겠다던 (아니 차마 쓰겠다고, 하겠다고 공언하지 못해 그저 시를, 문학을 가슴에 조심스레 품었던) 스물 남짓 문청(文靑)들에게 (특히 마음속 소녀를 어쩌지 못하고 어른이 된 그녀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한 이름이 있었으니, 시인 최승자(1952- )다.

물론 그 이름이 우리들의 유일한 이름은 아니었다 해도, 그녀가 시 속에서 토해내는 고통과 괴로움은 너무나도 절절하고 지독한 것이어서, 너무나도 뜨겁고 또 차가운 것이어서, 하여 너무나도 아찔하고 아득하게 아름다운 것이어서, 우리들은 강의실에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깊은 밤 들끓는 불면의 침대 위에서 최승자의 시구(詩句)들을 중얼중얼 주문처럼 되뇌곤 했다.

“이상하지, / 살아 있다는 건, /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 빈 들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 세상으로 출근하리라.”(<20년 후에, 芝에게> 중)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악순환> 중)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 내 등 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시작> 중)

“죽을 때까지 당신들을 교묘히 속이겠어요. / 당신들이 안녕히 속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예요. // 속이고 또 속일 수 없는 어느 순간 / 거짓말처럼 가비얍게 / 내 일평생을 건너뛰어 버리겠어요.”(<고백> 중)

그러나 시집의 제목은 <즐거운 일기>. 인생의 어느 날, 기쁨과 희망보다 훨씬 더 많은 좌절과 방황과 상실과 슬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들이 너무도 쉽게 악몽과 공포로 둔갑해 우리의 숨통을 죄어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인생의 어느 날, 그래도 그 어느 하루에 ‘즐거운 일기’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는 생의 비밀을 힘겹게 배워가며, 어김없이 시간이 흐르고, 최승자의 시를 중얼거리던 우리들은 어느덧 서른을 넘어섰다. 그러나 서른이라는 시간은 이미 최승자가 말하였듯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찾아오는 나이였으니···, 강고한 침묵 속에서도 상처와 비명이 난무하는 ‘즐거운 일기’는 계속된다.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 죽지 못한다, 혹은 / 죽지 않는다. / 드라마가 되지 않고 / 비극이 되지 않고 /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 되지 않는다, /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비극> 중)

우리들은, 세상 모든 그녀들은 야금야금 지쳐버리고 말았다. 조금씩 조금씩 병들어간다. 조금씩 조금씩 죽어간다. 구원은 없고, 가장 놀라운 비극은 구원이 없음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꿈 없이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싶다는 바람만이 간절해진다.

“두드려라, 안 열린다. / 두드려라, 만에 하나 열릴지도 모르니까. / 두드려라, 안 두드리면 심심하니까. // 슬퍼하기 위해 /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물러가라 모든 밝음 / 물러가라 모든 빛들 / 쉬잇, 우리 모두 조용히 하자. / 흐르는 물결 위에서 그녀를 / 그대로 잠들게 하자.” (<시간 위에 몸 띄우고> 중)

그래도 그녀들은 열심이었다. 그토록 열심이었던 위선도, 위악도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그녀들의 미련한 미련, 가련한 시련, 참혹한 단련, 그러나 사랑! 모순을 넘어, 사랑마저 넘어, 계속 사랑할 수 있다면.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 (중략) //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 살아, / 기다리는 것이다, /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중)

그녀들은 이제 피투성이다. 콘크리트 벽 앞에서 주먹이 바스라지고, 사랑을 증명하려고 무참히 꺾여 꽃병에 꽂혔다. 찢어지고 썩고 허물어지고 울고 문드러지고 떠돌고 꺼져 들어가고···,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라고 시인은 도리질을 쳤지만, 비유만이, 언어만이, 시만이 나약한 우리가 가진 거의 전부임을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괴로운 목소리로, 애끓는 신음으로, 쓰디쓴 그리움으로 토해내는 그 비유가, 그 시가, 그 노래가 사실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이 우주에 제법 널리 알려져 있는 비밀이다, 진실이다.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 까꿍! 피어날게요. //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전문)

욕망의 시간, 치욕의 시간, 흘러 흘러, 예전만큼 시를 읽지 않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곳에서 시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결코 생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기에, 그녀들의 ‘즐거운 일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즐거운 일기’는 비유다.


소설가 coolpond@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