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녀… 한 뼘의 현실에서 희망을 찾다남편도, 아이도 잃고 삶의 벼랑에 선 여인의 상처극복기뛰어난 리얼리티… 칸 국제영화제서 비상한 관심 모아

<> <밀양> 제60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휴양도시 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에 의하면,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이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수상권에서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 ‘세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비밀스러운 햇빛’이라는 제목의 의미만큼이나 <밀양>은 제작과정 내내 내용은 물론, 영화 안팎의 모든 이야기들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원수를 용서하려 했으나 용서의 권리마저 신에게 선점당해버린 여자가 세상과 신을 저주하면서 처절하게 궤멸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밀양’이라는 실재하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밀양>은 사람이 사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동네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진부하게 가장 특징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흔해 빠진 도시다. 특별할 것 없는 도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란, 곧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즉, <밀양>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셈이다.

용서해 봤지만… 신과 인간은 모두 복수의 대상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서 영화는 갑자기 시작한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오던 여자 신애(전도연).

내려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 오도가도 못하게 된 신애를 도와 준 남자는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이다. 피아노 학원을 하며 밀양에서의 새 삶에 적응할 무렵 예기치 못한 사건이 신애를 덮친다.

집을 비운 사이 아들 준이 사라진 것이다. 설마설마 했지만 유괴범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얼마 후 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아무 죄도 없는 자신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신애는 방황하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기독교에 귀의한다. 종교를 통해 안정을 찾은 신애는 거듭난 인생에 따라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존엄이 벌레와 같은 처지로 추락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죄와 용서라는 종교적 질문을 담은 원작 <벌레 이야기>를 다소 비틀었다. 중요한 설정들을 바꿈으로써 원작과 완전히 다른 주제와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잃은 여자가 자학적 파괴로 치닫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밀양>은 신성에의 도전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보다 어떻게 현실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지 않았는데, 이미 용서가 이루어졌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윤리적 생각들을 담은 원작을 각색하면서 <밀양>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신애에게 신과 인간은 모두 복수의 대상이다.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신과 인간을 향해 망가짐으로써 복수한다. 순진한 바보처럼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종찬에게 위악적으로 굴고 신성을 가장한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능멸하려 든다. 하지만 종국에 정신병원까지 다녀 온 신애가 당도한 것은 한 뙈기 햇볕이 내리쬐는 흙마당이다. 그곳엔 끔찍이도 자신을 아끼는 종찬이 있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손바닥 만한 햇볕이 있다.

<밀양>은 그렇게 비밀스러운 작은 빛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고통을 이기는 비밀의 햇볕

<밀양>을 찍으면서 이창동 감독이 설정한 목표는 '털끝만큼도 가짜 냄새가 나지 않는 생짜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연출이나 연기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 한 제작진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특히 ‘비밀스러운 햇볕’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 가까운 곳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귀한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건 생생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다.

송강호와 전도연 두 프로페셔널 배우의 연기도 출중하지만, 조·단역으로 열연을 펼친 비직업 배우들의 격의 없는 연기는 펄펄 뛰는 생생한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다.

연기의 관습이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비직업 배우로부터 진짜 연기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이 감독은 주연 배우를 제외하고 모두를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진행한 오디션을 통해 뽑힌 낯선 얼굴들은 생전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답지 않게 천연덕스러운 연기들을 보여준다.

유괴범 박도섭의 딸이나 신애의 아들 준이, 약국집 남편 강장로, 극의 후반부에 나오는 부흥회 목사는 모두 연기 경력이 전무한 순수 아마추어들이다. 이처럼 실제 현실 속에 있는 인물들에 가까운 비직업 배우들을 출연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과 상황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도연, 송강호 두 주연 배우가 감수한 고통 또한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촬영 도중 몇 번이나 포기를 생각했다는 10년 넘는 배우 이력 동안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자괴감을 느꼈을 만큼 극한 상황까지 몰렸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과연 전도연은 신애의 고통을 어렴풋이라도 느꼈을 법한 살아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송강호 역시 꼭 그에게 기대할 법한 믿음직한 연기로 보답한다. <밀양>의 주인공은 신애 역의 전도연이지만 이 영화가 결론적으로 보여주려는 그 장소엔 송강호가 연기하는 종찬이 있다.

실 없고 속물적으로 보이는 남자 종찬을 통해 진정성 있는 선의와 애정이 극한의 고통을 이기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영화 <밀양>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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