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 수다가 재미있는 살인 추리극

“이건 크리스마스를 앞둔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이건 절대 누구도 알면 안 되는 비밀 얘기야. ”

연극 ‘8인의 여인’이 상연 중이다. 바깥으로 뿌옇게 눈이 쌓인 유리창. 그 거실 안으로 8명의 여인들이 드글거린다. 재산에 집착하는 알콜중독의 노쇠한 어머니, ‘부부’라는 이름뿐 평소 남편과 남처럼 지내는 아내. 어딘가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하녀.

처제이면서 형부집에 얹혀사는 연애 숙맥 노처녀. 남자관계가 복잡하고 행색도 요란한 여동생. 친부모인 부부보다 이 집 딸에 더 모성애를 보이는 수상한 여자 집사, 그리고 두 딸 등이다.

한 명이든 여덟 명이든 무대에 나오기만 했다하면 수선스럽기가 말할 수 없다.

이 집안의 중년 가장이자 아들, 남편, 형부인 남자가 갑자기 침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곧 본론으로 돌진한다. ‘우리 안에 살인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내 딸의 확신에 찬 추리가 모두를 고립시킨다.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씩 간밤의 행적과 사생활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겉보기엔 그저 수다스럽고 ‘남들만큼만’ 복잡해 보이는 이들의 범상찮은 비밀이 차례차례 드러난다. 충격적인 수위의 비밀들이다.

거의 용의자가 추정되려는 찰나, 갑자기 살인극의 정체가 밝혀지며 사태가 뒤집힌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마치 잠시 기괴한 꿈을 꾸고 난 기분이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다. 초현실극의 정체미상 인형들처럼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는 단체 율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극 초반부터 웃어야 할지 어떨지 주춤거리게 한다. 극은 시종 엉뚱하고도 독특하다.

현재 서울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에서 선보이고 있는 ‘8인의 여인‘는 프랑스 연극계의 흥행작가 로버트 토마스의 원작을 황재헌이 국내판으로 옮긴 것이다.

원래 연극으로 출발한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돼 2002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 등을 수상했다. 연출가 황재헌은 전작 ’썸걸즈‘에서 리얼한 현실 묘사로 주목을 모았던 청년연극인이다.

계속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사의 상당부분을 놓칠 만큼 여인들의 난장판 수다가 대단하다.

이 여덟 명의 여인 안에는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거의 모든 여자의 모습이 들어있다. ‘나’도 보이고, ‘내가 아는 여자’, ‘내가 싫어했던 여자’도 보일 것이다. ‘남자를 잘 아는’ 또는 ‘남자를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여자’도 끼어있다.

심각한 대목에서 돌연 웃음을 촉발하는 코믹대사들과 아울러 제법 따끔한 철학적 대화도 엿보인다. 시간이 갈수록 극의 어수선함에도 점점 인이 박힌다.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노모역의 이주실의 연기는 관록 그대로다. 노련하면서도 성의있다.

우아하지만 껍데기 아내일뿐인 갸비 역의 이연규 역시 배역에 걸맞은 연기 색깔을 선보인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동생 역의 삐에레떼 정재은의 열연도 작품을 풍성하게 한다. 그 외 박명신, 구혜령, 진경, 방진의, 이영윤 등의 호연도 각자의 빛깔을 빚어낸다.

살인 추리극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이 공연은 전혀 칙칙하지 않다. 더 안을 들여다보면 ‘사랑’과 ‘관계’에 대한 여성들의 심리와 상처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어두움과 코믹함이 뒤섞인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영화로도 연극으로도 아직 이 작품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라면 미리 이런 추리놀이 한번쯤 어떨까.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여러 이름의 여러 여인들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은밀한 사건이란 과연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여인들에게 에워싸인 남자는 기쁠까 슬플까 아니면 괄호일까. 10월7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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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