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한상혁·김서룡 컬렉션에 산울림·한영애 노래 효과만점

익숙한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비누라는 단어에서는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연상되고 솝이라는 단어에서는 향기가 풍겨 나오는 듯한 착각은 비단 우리가 속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것들은 같이 한 세월이라는 죄목으로 조강지처 구박받듯 하기 일쑤다. 단어마다 온갖 기억이 누덕누덕 붙어 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한 세대를 돌아 혈관 속 추억이 말끔히 비워지고 나면, 참신함을 회복한 우리 것은 밖에서 온 것들과는 감히 비견할 수 없는 폭발력을 가진다. 가요가 울리는 패션쇼장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도 팝송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어울린다.

"속삭여 주세요… 그 말을 더더더"

올해 3월, 서울컬렉션에서 디자이너 한상혁이 올 가을 패션을 예고했다. 발목을 드러낸 바지와 어깨를 덮는 케이프가 사랑스러운 소년들은 이제 막 아버지로부터 수트 입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음악 속에 말 소리가 섞여 들린 것이다.

"속삭여 주세요.

들릴 듯 말 듯 그 말을 더더더.

그냥 앉아 있어요.

지금 만난 것처럼 조금만 더."

가요가 나와서 신선했냐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파릇하게 날 선 어린 소년들 사이로 섞여 든 나이든 남자의 노련한 목소리, 그 둘의 어우러짐이었다. 세상에,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소년들이 바닥에서 2cm쯤 떠서 걷는 것처럼 분위기가 노곤노곤 부드러워졌다.

"짖궂게 생각 마세요 이 맘은 더해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아 있어요.

내게 날개가 있다면 그리움을 그릴 수 있다면

날아가겠어요 보여드리겠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끈덕지게 지분대는(?) 내용의 가사는 소년들에게 남성적 매력을 입히는 마력을 발휘했다. 복근 하나 드러내지 않고도 패션쇼 바닥은 은은한 성 호르몬으로 덮였다.

쇼가 끝나고 디자이너가 나와 인사를 할 때쯤 맨 앞 줄 어딘가에서 김창완이 일어났다. 디자이너로부터 직접 기타를 건네 받은 그는 웃음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을 한 번 더 웃음으로 찌그러뜨리며 방금 울렸던 음악, 산울림의 '더더더'를 라이브로 연주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바닥까지 녹아 내렸다.

"그때 쇼의 주제가 그라데이션(gradation)이었어요. 제가 회사를 옮긴 후 처음으로 여는 컬렉션인 만큼 천천히 조금씩 잘 해나가자 라는 메시지를 전한 거죠."

디자이너의 곡 선정 사연이 꼭 관중의 마음과 일치하라는 법은 없다. 아무리 그래도 한상혁이 '더더더'를 선택한 이유는 그야말로 예상을 완벽하게 비껴간다.

엠비오라는 브랜드의 수장을 맡게 되면서 그는 오래 정체한 나머지 이제는 흐릿해진 브랜드의 얼굴을 밝혀내고 싶었단다. 마치 탐정이 범인의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는 것처럼. 그래서 그 해 옷의 테마는 홈즈가 되었다.

천천히 밝혀내고자 하는 의지는 서두르지 않고 점층적으로 브랜드를 일정 궤도에 올려 놓겠다는 그의 마음가짐과도 일치했다. 점점, 조금씩, 더 를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은 뭐가 있을까. 이렇게 '더더더'가 쇼의 음악으로 낙점됐다.

결국 홈즈와 김창완이라는 요상한 조합이 탄생했지만 기승전결이야 뭐가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닌 패션쇼 객석에서 느낀 황홀한 조화다.

"패션쇼에서 음악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세요? 쇼는 옷과 옷의 뉘앙스를 보여주는 장이에요. 저는 이 둘이 5대 5의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옷의 뉘앙스 중 절반, 그러니까 전체의 25%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에요."

한상혁 디자이너가 가요를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성장이라는 테마로 연 컬렉션에서는 루시드 폴의 음악을, 그 다음 컬렉션에서는 어어부프로젝트의 보컬 백현진 씨의 음악을 틀었다. 모두 포크 또는 포크로 분류해도 무리 없는 음악들이다.

"포크를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장르가 가진 서정성, 섬세하고 담백한 가사, 사상의 전달력이 제 옷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가사에 주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그 이야기들이 옷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팝송을 쓸 때는 기대할 수 없는 효과죠"

얼마 전 마무리 된 2010 S/S 서울컬렉션에서도 한 번 더 가요를 들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 김서룡은 수트에 바친 20여년의 세월을 증명하듯이 칼로 자른 듯 정확하고 완벽한 테일러링을 보여 주었다. 부드러운 밀크 캐러멜 색의 수트를 입은 남자들의 행렬 사이로 홀연히 여자의 처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였다. 순간 쇼장은 최신 트렌드를 보여주는 장소가 아닌 시대별 복식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디자이너의 회고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련한 분위기가 번졌다. 한영애의 얼굴을 가리는 긴 머리와 노래할 때의 표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기분이 더 했을 터다.

디자이너 김서룡은 이번 시즌의 테마를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로 정했다. 그 속에 내가 없다는 말은 너무 많은 변형이 가해지고 있는 요즘의 수트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디자이너의 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모델도 경력 10년 이상의 30대 모델들을 기용했다. 옷에 시대감을 더하기 위한 장치였다. 컬렉션을 위해 옷을 만들고(그는 쇼에 등장하는 모든 옷을 직접 재단하고 꿰맨다) 디자이너로서 보낸 세월을 돌아보며 그가 들은 노래가 바로 '봄날은 간다'였다.

가사처럼 정말 그의 '보옴날이 가아버린' 것은 아니지만 돌아본다는 느낌을 전달하기에는 이보다 적합할 수 없었다.

"옛날 노래 밖에 몰라서요"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감정이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음악에 녹아 듭니다. 관중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그냥 들으면서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면 다행이지요"

이미지 극대화, 메시지 전달, 아니면 단순한 충격… 디자이너나 쇼 디렉터가 음악에 기대하는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하다.

때문에 한동안 팝송과 재즈가 공식처럼 흘러 나왔던 패션쇼장에서 우리 말 가사를 가진 가요는 새롭게 떠오르는 다크호스다. 물론 패션쇼에 가요를 트는 일이 대세가 될 가능성은 적다. 문제는 가요든 팝송이든 옷과 어떻게, 얼마나 어우러지느냐 하는 것이니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