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한국 패션문화 쇼룸 내년 2월에 열려… 정욱준 등 작품 홍보
지금 이들 중 둘은 은퇴한 지 오래지만 당시 이들이 준 충격은 패션계에 재패니즈 시크라는 단어로 남았고 현재 유럽과 뉴욕에서 에비수, 어 베이싱 에이프 같은 브랜드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데 한몫하고 있다.
1990년대. 이번에는 벨기에 디자이너들이 상륙했다. 벨기에 앤트워프의 왕립예술학교 출신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 앤 드뮐미스터, 마틴 마르지엘라 등 6인은 스스로를 '앤트워프 식스'라고 칭하며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절제와 파격의 미로 미니멀리즘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이제 트렌드는 바뀌었지만 앤트워프는 패션의 도시로, 왕립예술학교는 런던 세인트 마틴 등과 함께 패션 유망주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명문으로 자리했다.
"이제 코리안 시크를 말해야 할 때 아닙니까?"
패션과 미술에 대해 깐깐하고 사려 깊은 글을 써온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씨는 일본 디자이너 3인방이 일군 재패니즈 시크를 인용하며 말했다. 때는 정부가 한국에도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며 6년 안에 3개 이상의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선포한 직후였다.
최근 또 다른 정부 주도의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내년 2월 뉴욕패션위크 하루 전인 12일부터 14일까지 패션문화쇼룸을 열고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우리 디자이너 6명의 작품을 홍보하겠다고 밝혔다. 관(官) 주도라는 대목에서 일단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에는 몇몇 눈길을 사로잡는 내용이 있다.
단순히 옷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음식, 음악, 공연 등 복합 문화 콘텐츠로 접근하겠다는 것,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지리상으로 최적의 위치인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뉴욕패션위크가 열리는 브라이언트파크 바로 옆)라는 것, 이곳에서 열리는 오프닝 파티를 CFDA(뉴욕패션디자이너협회)가 후원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 앤디앤뎁, 에서 , , 로 이어지는 디자이너 라인업에 이르러서는 기대감은 약간의 흥분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뭔가 제대로 하려나?
"디자이너들의 시그너쳐 의상을 촬영했습니다. 80 페이지 분량의 매거진 형식으로 만들어서 뉴욕타임스 같은 유력 매체나 업계 핵심 인물들에게 뿌릴 계획입니다. 카탈로그 외에 패션 잡지 편집장들의 인터뷰나 한국을 소개하는 내용도 들어갈 거구요."
이번 프로젝트의 실질적 진행을 맡은 제일기획의 김형욱 차장은 막 뉴욕에서 화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로즈마리 트로켈은 회화, 설치, 영상 분야에서 자극적이면서도 사유 깊은 작품들을 선보여 왔는데 그에게 디자이너 6인의 작품과 어린 시절 사진 등이 전달됐다. 이들을 이용해 만든 영상물은 전시 기간 동안 벽에 투사돼 디자이너들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커티스 앤더슨은 디자이너들의 의상 3벌을 가져갔는데 이것을 종이처럼 2차원적으로 표현해 벽을 장식할 계획이다. 한국의 작가들과 협업해 한국에도 훌륭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리면 더욱 좋겠지만 '현지 연착륙'이라는 지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두 번째 믿는 구석은 CFDA다. 뉴욕패션디자이너협회인 CFDA는 뉴욕 패션계를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단체다. 12일 열리는 오프닝 파티를 이곳에서 후원함으로써 뉴욕 패션계 유명 인사들과 보그 등 굴지의 패션 잡지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이 가능해졌다. 보통 뉴욕패션위크에 쇼를 여는 디자이너는 200여명, 여기서 현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컬렉션은 20%도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히 군침 도는 기회다. 물론 디자이너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6명의 디자이너는 이미 해외 진출 경험이 있거나 해외 진출에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 중 국내 심사단과 현지 심사단의 심사를 거쳐 선발됐다. 뉴욕패션위크를 총괄하는 IMG의 부회장과 파슨스 학장, 뉴욕타임스 T매거진 편집장, 전 삭스피프스애비뉴 총괄 바이어 등 쟁쟁한 현지 심사단의 판단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원래 5명을 뽑으려고 했는데 5등이 두 명이 되어 의도치 않게 앤트워프 식스처럼 6인방이 되었다.
이중 뉴욕 컬렉션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는 앤디앤뎁. 부부 디자이너인 김석원과 윤원정은 근 10년째 로맨틱 미니멀리즘이라는 콘셉트를 흔들림 없이 지켜가고 있다. 현재 뉴욕을 휩쓸고 있는 동양계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나 필립 림처럼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성을 놓치지 않는 옷을 선보이고 있어 기대가 높다. 은 파리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경우. 준지(juu.j)라는 프리미엄 라인으로 5번의 컬렉션을 열었으며 칼 라거펠트가 준지의 옷을 입고 펜디 컬렉션 피날레에 서면서 더 유명해졌다. 트렌치 코트라는 클래식 아이템을 그만의 감성으로 변용하는 데 독보적이다.
서른 중반이 다 돼서 패션을 시작한 그가 자신의 본거지인 뉴욕으로 돌아와 그의 구조적이고 미니멀한 의상들을 선보이게 된다. 데무의 디자이너는 뉴욕패션위크 기간 동안 전시와 별도로 쇼를 준비 중이고, 참가 디자이너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디자이너는 이번 프로젝트 외에도 영국패션위크와 프랑스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패션 무대, 다음 타자는 코리아"
패션과 함께 선보일 음식과 음악 선정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한국의 술과 돔 페리뇽을 함께 내놓는다거나 한식 재료를 사용한 카나페 등으로 부담 없이 은근하게 한국의 문화를 알릴 예정이다. 구체적인 셰프나 뮤지션 선정에 대해서는 아직 조율 중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뉴욕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겐 아직도 기회의 땅이다. 패션 사대주의가 비교적 덜 한 데다가 멋지고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시장이다.
앤트워프 식스와 재패니스 시크 3인방의 성공 뒤에는 정부의 치밀하고도 아낌 없는 지원이 있었다. 물론 정부의 역할은 밥상을 차리는 것 까지다. 진짜 승부는 내년 2월 12일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에 걸릴 디자이너들의 옷에서 판가름이 난다. 요지 야마모토와 마틴 마르지엘라가 패션의 종주국에 던진 신선한 파문을 그 날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