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강원도 화천

산소길
아득한 산고개를 굽이굽이 셀 수 없이 넘어서고 고불고불 흙먼지 날리며 너댓시간을 달려야 갈 수 있었던 예전의 화천.

그러나 이제는 새로 난 넓디 넓은 직선길로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성큼 들어설 수 있는 당일치기 여행지가 되었다.

4월 중순, 놓친 봄을 아쉬워하던 차에 마음 맞는 이들과 어울렁더울렁 아직은 덜 알려진 그래서 더욱 심심한 추억으로 남겨질 화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즈음이면 화사하게 봄 물든 풍경을 내보일 법도 한데 올해는 유난히 화천의 봄이 지각을 했다.

안 그래도 화천의 봄은 더디게 오고 잠시 봄인 양해 산허리에 눈길 한 번 주노라면 어느새 둘러쳐 흐르는 강물 따라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봄이 가장 먼저 온다는 화천강물을 좇아 봄맞이를 하는 여정을 잡았다.

화천은 강물에 가장 봄이 먼저 온다
걷는 물길

요즘 여행은 '길'표가 유행이다.

제주의 올레길이 '걷기'를 '일'로 만들더니 여기저기 걸을 수 있는 곳곳마다 두어자의 제 본래 이름 앞에 '길'이라고 새삼스런 이름표를 붙였는데 서로 자랑스레 내 건 '길' 이름표는 참으로 곰살맞고 정겨움이 느껴져 때론 그 길을 걷고 싶어지기도 한다.

산속의 섬, 물의 땅 화천여행을 '걷는 길'부터 하기로 작정하고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직접 명명했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은 화천강을 가로지르는 통통다리에서 시작해 물위에 설치한 1.2km 길이의 수변테크를 따라 원시림 상태를 그대로 보존한 용화산 1km 흙길까지 이어지는, 총 2.2km의 화천만이 지닌 아름다운 길이자 화천의 명소다.

부교로 되어 있는 로 향하는 통통다리를 건너는 이들이 찰랑거리는 물결을 발밑에 감으며 간다. 조붓한 이 다리 하나로 연결되는 은 화천댐 가까이까지 이어지는 약42km나 되는 자전거 도로와도 연결되어 청정한 환경을 지키고, 화천강 물길을 따라 관광자원을 개발해 보려는 화천의 의지가 담겨 있는 다리다.

파로호 물길을 따라 평화의댐에 닿는 물빛누리호
북한강 도도한 물줄기와 울울창창한 산을 이토록 진하게 담을 수 있는 곳이 어디 또 있을까. 싱그러운 풀기운을 머금은 무성한 숲을 옆에 끼고 물길로 내려선 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휘도는 물위에 조붓히 길을 낸 . 밤과 낮의 기온차가 커지면 은 피어 오르는 물안개로 인해 몽환적 풍경을 자아내는데 햇빛이 창창하니 안개 대신 제 그림자를 드리워 투명하고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을 펼쳐 놓았다. 한껏 게으른 걸음으로 느긋하게 을 걸어 보시라.

물빛에 취하며 사부작사부작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아래서 찰랑거리는 물의 흔들림이 닿고, 수런수런 초록물 오른 봄산을 눈으로 즐기노라면 어느새 마음엔 평강이 내려 앉는다. 화천의 은 마음에 평화를 여는 길이다.

배를 타고 협곡을 오르는 파로호

화천에는 걷는 물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4월초에 취항했다는 물빛누리호가 파로호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제 그림자를 호반에 드리운 채 느긋하다. 그러나 파로호의 옛 얘기를 안다면 이 푸르고 푸른, 깊디 깊은 물이 품은 아픔에 한 번쯤은 짧은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까.

파라호 전경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을 만들며 생긴 인공호수로 하늘에서 바라 본 생김이 대붕을 닮았다 해 대붕호라 불렸다. 그러나 6.25전쟁때 치열했던 화천 전투에서 수만 명의 중공군을 수장해 승전보를 울렸다 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무찌른 곳'이라는 뜻으로 파로호라 개명 했다고 하니, 부드러운 어감만큼이나 아름다운 전경을 지닌 파로호에 담긴 살벌한 핏빛 역사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잔뜩 흐린 하늘빛이 무겁게 내려 앉은 파로호에서 출발을 알리는 물빛누리호의 엔진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역사의 상흔도 유유한 시간을 담아내고 품어 온 파로호의 물로 치유되고 아물어 가는 것일까.

잔잔한 물결 위로 작은 섬들의 반영이 드리운 파로호는 고즈넉하고 평온한 풍경을 자아내는데, 어느새 구만리 물길을 벗어 난 물빛누리호의 뱃전에서는 봄빛으로 물들어가는 일산(해뜨는 산)과 월명봉이 펼치는 절경에 탄성과 함께 요란한 카메라 셔터소리가 호반의 고요를 깨뜨린다.

한 시간을 넘게 파로호를 달리던 물빛누리호가 거대한 은빛 돌벽을 마주하곤 서서히 엔진소리를 재운다. 파로호의 물길을 멈추게 하고 물빛 누리호를 세운 평화의댐 저 너머에서 물길 대신 산길을 둘러둘러 파로호를 넘어 온 버스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총총히 산모롱이 속으로 사라져 가고, 탐방로를 오르면 전쟁과 내전을 치른 세계의 분쟁국가에서 보낸 총알과 포탄을 녹여 만든 평화의 종이 파로호 푸른 물결을 내려다 보고 있다. 화천 파로호의 물길에서 세상의 평화를 누리고 담았다.

아득한 물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민통선

민통선 안에서도 화천의 물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물길을 따라 민간인 통제선 안으로 들어 간다. 그러나 이내 높다란 철문 앞에 일행을 태운 버스가 멈추고 겹겹이 쳐놓은 바리게이드와 철문을 사이에 둔 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앳된 젊은이는 연신 우리쪽과 초소를 오가며 무언가를 확인한다.

동행한 문화해설가가 현재의 지점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인제군 양구읍인데 눈 앞에 보이는 산속길을 차량으로 관통해 화천으로 가야 한단다. 새삼 이 땅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임을 실감하며 유유자적 흐르는 물을 부럽게 내려다 봤다. 그러나 버스는 멈추고 일행들은 안동철교라 불리는 교각 앞에서 저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흐르는 물을 내려다 봤다.

지금은 이렇게 철교가 세워져 안동대교라 불리지만 전쟁이란 슬프고 처절한 사건이 없었던 그 시절엔 화천강 물길을 따라 황포돗배가 소금을 싣고 오가던 안동포란 포구였단다. 하지만 현재는 눈에 잡힐 듯 보이는 23km 너머부터 북한의 물길이라는 설명에 가슴 한 켠이 알싸해졌다. 이데올로기는 물길마저 경계를 지우고 물길의 이름을 지우고 소금배를 잃게 했지만, 물은 그저 흐르던 물길을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잔뜩 웅크린 채 람사르 협약에 가입한다는 습지를 내려다 보는데, 후다닥, 고라니 한 마리가 눈 앞에서 내달려 강가에서 뛰어 다닌다. 모두 안도의 탄성을 울렸다.

그랬다. 전쟁이란 상처가 지금도 이어지고 길고 깊은 흉터를 남겼지만 이 곳에도 생명의 온기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저 길을 낸 사람만이 이 길을 포기했을 뿐, 물도 바람도 산새도 고라니도 모두모두 이 길에서 여전히 머물고 함께 살고 있었다.

긴장감에 자석처럼 쩍쩍 들러 붙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한결 가볍게 안동철교 위를 건너 다시 버스를 탔다. 이 민간인통제선구역 물길이 로 이어지며 닫히고 막힌 파로호 물길을 여는 그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화천 민통선 안의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물길에는 수 많은 생명들의 평화로운 삶이 있다. 차창 너머로 주소조차 알 수 없는 안동철교는 멀어지는데 화천강은 변함없이 나란히 동행을 한다.



글·사진=양지혜 여행작가 himei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