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옷(8) 시도 때도 없는 드레스 업시폰 드레스, 하이힐, 세팅 퍼머…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 입는 여자들

촬영:마이클 허트, 출처:feetmanseoul.com
"이화여대 앞에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 진짜 패션쇼가 따로 없어요."

한국은 명품 브랜드들이 아시아에서 최고로 손꼽는 테스트 마켓이다. 트렌드를 흡수하는 속도가 빠르고 소비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성공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성공한다는 건 패션계의 불문율이다. 론칭을 위해 방한한 글로벌 패션 기업 CEO들의 공통적인 말은 "한국 여자들의 패션 감각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한껏 갖춰 입은 여자들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미국인 포토 그래퍼 마이클 허트는 그들의 엄청난(?) 패션 센스에 약간의 의아함을 표했다.

"한국에서는 강의실에서 런웨이 의상을 입어요. 유럽에서는 칵테일 파티에서나 입는 드레스들이거든요. 뉴욕 같은 도심지에도 화려하게 입은 여자들이 많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캐주얼해요. 만약 외국에서 한국 여자들처럼 입고 나간다면 분명히 오늘 어디 파티라도 가냐고 물어볼 걸요?"

어디 파티라도 가세요?

잘 갖춰 입기, 드레스 업(dress up)은 한국 패션신의 중요한 특징이다. 허트가 의아하게 여겼던 지나친 드레스 업, 또는 시도 때도 없는 드레스 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릎 길이의 참하고 여성스러운 원피스. 주로 리본이나 러플 장식이 달려 있으며 꽃무늬나 다른 귀여운 패턴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정성스럽게 세팅한 헤어 스타일, 여성스러운 가방과 귀걸이, 메이크업, 마지막으로 하이힐도 빠져선 안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천상 여자' 스타일로 꼼꼼히 갖춰 입은 한국 여자들을 두고 뉴욕타임즈의 는 "아이러니라고는 철저히 배제한" 옷차림이라고 이름 붙였다.

확실히 국내에서는 패션업 종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드레스에 스니커즈를 신거나 점퍼에 시폰 스커트를 입는 식의 아이러니, 즉 믹스 앤 매치(mix & match)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라이더 재킷과 시폰 원피스의 조합은 대중화된 한국 최초의 믹스 앤 매치였다.

개인의 패션 성향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황 중 하나는 T.P.O(time, place, occasion)를 논할 때다. 한국 여자들의 '천상 여자' 차림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칵테일 파티의 전형적인 드레스 코드다.

귀족사회로부터 패션이 이어져 내려온 서구에서는 생각보다 옷의 낮밤 구분이 대단히 엄격한 편인데, 데이 웨어의 경우 노출이 적은 셔츠나 블라우스, 원피스를 입더라도 면이나 모처럼 광택이 적은 소재를 택한다. 데님, 재킷, 로퍼, 운동화는 전형적인 낮 전용 아이템이며 비교적 크기가 큰 캐주얼 백을 메고, 구두에 있어서도 발등 노출이 많으면 상황과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이브닝 웨어로 가면 보석 달린 스트랩 슈즈, 하이힐, 가슴이 깊게 패인 톱 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몸매를 드러내는 발목 길이 드레스, 샹들리에 귀걸이, 크리스털이 박히거나 실크 소재의 작은 클러치 백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데이 웨어와 이브닝 웨어 가운데 위치하는 것이 칵테일 드레스로 무릎 길이의 실크 소재 원피스, 적당한 높이의 하이힐, 중간 크기 클러치나 토트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한국의 여자들은 이 옷을 입고 강의도 듣고, 사무실에서 일도 하며, 친구도 만나고 상견례도 하는 셈이다.

전직 패션 에디터이자 <잇 걸>의 저자 이선배 씨는 "우리나라 여름 풍경 중 가장 이상한 것은 사무실에서 아슬아슬한 선 드레스를 입고 하얀 카디건을 덧입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 드레스는 바닷가로 놀러 갔을 때 그것 하나만 입는 옷이며 보통 그 위에 걸치는 카디건은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네크라인이 깊이 패인 이브닝 드레스를 굳이 낮에 입고, 안에 어울리지도 않는 색상의 톱을 받쳐 입는 것도 참 촌스러워 보인다. 자신이 가진 원피스를 업무, 일상, 파티용으로 구분하기만 해도 베스트 드레서의 첫 발을 뗐다고 할 수 있다."

말리지 말아요, 시집 가야 하니까

한국에서 패션은 상황과 장소에 지배받기보다 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패션에 공 들이는 사람이라면 강의실에서도 짧은 치마에 귀걸이를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평소 '먹고 살기 힘든데 패션이 다 뭐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혼식이라 해도 점퍼에 청바지 차림으로 참석하는 것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여자들은 전자 쪽이다. 그들이 이토록 열심히,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하필이면 대단히 여성스럽게 차려 입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T.P.O에 대한 개념 부족이 원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들은 비교적 최신의 것들이 많다. 파티 문화가 잡지를 벗어나 대중화된 것도 불과 5~6년 전이며, 파인 다이닝, 해외 여행, 오페라 관람 등 문화생활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된 것은 모두 소득 수준이 일정 범위 이상으로 올라간 이후의 일들이다.

예뻐지고 싶고 예쁜 옷을 살 여건도 갖춰졌지만 '어디에서, 어떻게'의 법칙이 몸에 익지 않은 그녀들은, 해변가 드레스를 입고 비즈니스 모임에 임하거나 런웨이 의상을 입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우를 범하곤 한다.

그렇다면 '천상 여자' 스타일에 대한 폭 넓고 굳건한 선호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최근 파워 숄더, 글래디에이터 샌들, 스모키 메이크업이 전국을 강타했다고는 하나 참하고 얌전한 '샬랄라 아가씨'는 여전히 한국 여성들의 옷장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마이클 허트는 이를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찾는다. 여권(女權)이 약할수록 패션은 남성이 좋아하는 것, 또는 남성이 금기하는 것에 민감한 경우가 많다.

그에 따르면 한국 여자들의 포멀한 드레스 차림은 미국의 50년대와 꼭 닮았는데(이 말은 한국 패션이 미국에 비해 50년이나 뒤처졌다는 말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여자들은 지금에 비해 남성들의 시선을 훨씬 더 많이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여성스러운 드레스와 하이힐을 치워 버리고 장보러 갈 때 화장을 안 하는 것은 물론, 일주일에 한번씩 꼭 머리를 손질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남녀가 평등한 국가일수록 여자들의 화장이 옅어지고 구두의 굽이 낮아지는 것은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의 여자들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공 들여 자신의 여성성을 뽐내지만 일상이나 캐주얼한 상황에서는 노 메이크업에 티셔츠, 운동화, 바지로 연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북유럽은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해 성인이 되기 전의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중성적으로 꾸미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언짢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점점 더 평등해져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지는 않다는 거죠. 한국에서 남자는 여전히 남자, 여자는 여전히 여자예요. 여자들은 자신의 성 역할에 맞게 사교 모임 같은 곳에 나갈 때는 고전적인 여성 스타일로 한껏 꾸미고 나와요. 물론 서구 여자들도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한국 여자들의 특징은 그걸 매일 한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진짜 캐주얼은 찾아 보기 힘들다는 말은 그러므로 '비교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패션이 사회 변화의 척도라고 한다면 향후 우리 사회의 패션은 드레스 업에서 드레스 다운으로 이동하게 될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