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 정도준 작 '진일보'
서예(書藝)는 '도(道)'로 통한다. 그래서 '서도(書道)'라 한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수행하듯 먹을 갈고, 붓을 들어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점 하나, 선 한 줄에 혼이 담겨야 진정한 '글쓰기'라 말한다.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3인이 모였다. 학정(鶴亭) 이돈흥, 하석(何石) 박원규, 소헌(紹軒) 정도준이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헤이리 예술 마을의 갤러리 한길(031-955-2041)에서 내년 2월29일까지 '서예삼협 파주대전(書藝三俠 坡州大戰)'을 벌인다. 한길사가 창사 35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념 전시회다.

시나브로 '붓글씨'는 잊혀 가는 옛 것으로 내몰리고 있다. 붓을 대신하는 '붓펜'까지 등장해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란 인식을 확산시켰다. 정성스레 벼루에다 먹을 갈고, 크고 작은 붓으로 먹을 묻혀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마음을 담아 글을 익히던 모습은 이미 옛 추억이 돼 버렸다.

'서예삼협'은 변화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변화에 대응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빛내고 있다.

학정은 우직한 작품 활동과 함께 후학 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30년째 묵묵히 '학생서예대회'를 주최하면서 서예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학정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도 만들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즉석에서 휘호와 발문을 쓰는 몇 안 되는 대가다.

학정 이돈흥 작 '우후무등'
하석은 '석곡실(石曲室)'이라 이름 붙인 서실에서 '이미 시도한 형식을 답습하지 말자', '다른 작가가 쓴 내용은 쓰지 말자'는 작가주의적 집념으로 지난 25년 동안 해마다 작품집을 펴내는 공부하는 서예가로 유명하다. 문자학 소양과 필법 이론, 서학의 경험이 최고 수준에 올라있으면서도 분방하고 활달한 이미지와 다채로운 조형 어법으로 우리 서예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헌은 국제적인 서예가다. 19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관 초대전을 계기로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해외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글씨에서 뜻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정서와 달리 여백과 선이 만들어내는 회화적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한글 서예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서구 현대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서예삼협'의 뿌리에는 서예의 본질과 전통을 잇는 정신이 깔려 있다. 일찌감치 먹과 붓에서 문화의 힘이 발현함을 깨닫고 정진했다. 왜곡된 서예가 아닌 전통 '서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창호기자 ch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