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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금기된 진실'을 고발하다

●'사회성 영화' 잇단 개봉
제주 4.3사건 다룬 '지슬'… 관객 3만명 돌파 조용한 돌풍
고 장자연 연상 '노리개' 연예계 상납비리 담아
삼성 백혈병 노동자 실화 '또 하나의 가족'
다른 영화 비해 피해자 현존… 흥행 성공땐 사회적 파장 클듯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목적이 없다거나 목표가 없다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19세기부터 범람한 순수예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니체의 말처럼 예술은 오래 전부터 어떤 목적들을 품어왔었고 때때로 그것은 사회 변혁의 형태로 나타났다. 때로는 '홍길동전'처럼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담아내며 사람들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주기도 하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했던 것처럼 아예 사회 그 자체를 바꾸기 위해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해온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예술 분야로는 미술, 음악, 문학 등 여러 장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는 가장 직접적이면서 강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실제로 레닌은 러시아 혁명 직후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며 영화사업을 국유화했고 히틀러, 무솔리니 등도 이른바 선동영화들을 만들어 사회를 좌지우지한 바 있다.

영화가 지닌 사회적 영향력은 때때로 세상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슈퍼사이즈 미', '식코' 등은 맥도널드로 하여금 다이어트 메뉴를 만들게 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료보험 개혁안을 내놓는데 일조했다.

작은 변화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한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2011년 개봉한 '도가니'가 대표적이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장애아동 성범죄 사건을 다룬 도가니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도가니법'을 이끌어내며 실제 관련 인물들을 처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에 앞서 2009년 개봉된 '이태원 살인사건'도 공소시효 6개월을 남기고 14년 만에 범인을 다시 재판하도록 만든 바 있다.

최근 들어 현실과 맞닿은 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거나 또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 4.3사건을 다뤘지만 강정마을과 해군기지 등 현재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슬'과 '비념', 고 장자연씨를 통한 연예계 성상납 사건을 다룬 '노리개', 삼성 백혈병 사건을 담은 '또 하나의 가족' 등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대선 직전 개봉돼 적잖은 영향을 미친 '남영동 1985', '26년' 등에 이어 줄줄이 선보이는 사회고발성 영화들이 이번에도 잠자던 현실을 깨우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독립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군인 하나가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낀 초가집의 내부를 서서히 헤치며 다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제사에 쓰이는 식기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마루를 지나 도착한 방에는 젊은 여성의 시체와 칼을 갈고 있는 군인이 있다.

방으로 들어선 군인은 다른 군인이 갈고 있던 칼을 넘겨받아 손에 든 과일을 잘라 나눠 먹는다. 이 군인들은 누구며 왜 죽어 있는 젊은 여성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먹고 있는 것일까.

제주 4.3사건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좌우익 간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다. '제주 4.3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만 1만4,000여명에 달하며 3만명 가까운 학살 피해자가 나왔다.

'지슬'은 이처럼 제주도민 대부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제주 4.3사건을 그린 영화다.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피해 산속 동굴로 숨어들어간 제주도민들과 이를 쫓는 토벌대 모두가 '지슬'의 주인공이다.

'지슬'은 소위 '대박'난 독립영화가 됐다. 2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지슬'은 전국 115개 상영관에서 3만8,611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관객 1만명을 흥행 분기점으로 삼는 독립영화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성과다. 상복도 터졌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4개 부문을 휩쓸었고 올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 황금수레바퀴상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지슬'을 지켜본 사람들의 관심이 65년 전 일어난 제주 4.3사건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슬'을 만든 오멸 감독은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을 제사 지내는 영화일 뿐"이라고 못 박았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1948년의 제주를 넘어 2013년의 제주까지 이어져 있다. 내용상으로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지슬'을 통해 해군기지 건설 찬반논란이 거셌던 강정마을이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4월 3일 개봉이 예정된 다큐멘터리 '비념'은 '지슬'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를 다루고 있다. 과거의 제주 4.3사건으로부터 현재의 강정마을까지 이어지는 제주도의 아픔을 다룬 '비념'은 주로 예술영화전용상영관에 걸릴 예정이지만 '지슬'의 뒷바람을 타고 주요 영화관에 진출할 계획도 지니고 있다. '지슬'과 '비념'이 얼핏 끝난 듯 보이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를 다시 풀어가게 될지 주목되는 이유다.

"그래 봐야 계집 하나 아니요?" 연예계 상납비리를 다룬 영화 '노리개'에서 거대 권력집단을 대표하는 언론사 사주가 내뱉은 이 대사는 영화의 내용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고 장자연씨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 중이던 2009년 3월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자살 이후 전 매니저에 의해 공개된 일명 '장자연 문건'에는 기획사로부터 술접대와 성 상납 강요에 시달려 왔다는 내용과 함께 언론사 대표, 방송사 PD, 기업체 사장 등의 실명이 담겨 있었다.

해당 문건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며 여성 연예인 인권유린과 관련한 사회적 파장을 낳았지만 장자연 사건의 수사는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다.

4월 18일에 개봉하는 '노리개'는 부당하게 희생된 한 여배우와 비극적인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 정의를 쫓는 여검사가 거대 권력 집단과의 싸움을 벌이는 내용을 그린 법정드라마다.

일어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데다 어정쩡하게 종결된 사건을 다뤘다는 측면에서 '연예계판 도가니'로 불리지만 해당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도가니'와는 상황이 다르다. '노리개'를 만든 최승호 감독 또한 "실제 공판기록을 참고했지만 영화는 가공의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노리개'는 고 장자연씨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신인 여배우들에게는 큰 힘이 돼줄 것으로 보인다. 픽션이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상대방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의 세력이지만 고 장자연씨에게는 없었던 믿음직한 조력자들을 등장시켜 함께 맞선 것도 그런 일이 머지않아 벌어지리라 기대하는 감독의 바람과 의지가 담겨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해당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가 가해자인 언론사 사주의 수하가 된 옛 친구에게 건넨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희 보스 같은 사람, 겁먹기라도 하겠냐?"는 대사는 고 장자연씨를 죽음을 몰고 갔지만 여전히 편히 발 뻗고 자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감독의 메시지인 것이다.

김태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은 우리 사회 대표적인 권력집단으로 떠오른 재벌, 그중에서도 삼성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된 얘기가 아닌 불과 몇 년 전의 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지슬'보다 시의적이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대신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노리개'보다 현실적이다.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라도 이 영화가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 더욱 기대감을 모은다. 실제로 같은 사건과 인물을 다룬 만화책 <사람 냄새: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도 지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또 하나의 가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을 얻어 23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 고 황유미씨와 아버지 황상기씨 부녀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고 황유미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 3라인 디퓨전 공정 세척 업무를 맡은 지 1년 8개월 만인 200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일한 시간보다 더 길게 투병하다 2007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지난 3월 6일은 고 황유미씨의 6주기였다.

김 감독이 '또 하나의 가족'을 찍기로 결심한 이유는 황상기씨 역을 맡은 배우 박철민의 "우리 딸이 많이 아픈데요… 진성(삼성)이 그랬는데요… 아무도 안 도와줘요"라는 대사에 잘 나타나 있다. 거대권력인 삼성에 맞서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힘도 없는 택시기사 황상기씨의 힘이 되기 위함인 것이다.

이를 위해 김 감독은 황상기씨와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 관계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고 자료조사도 6개월 동안이나 진행했다.

'또 하나의 가족'이 흥행에 성공할 경우 그 사회적 파장은 다른 영화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이 세상을 떠났거나 공개되지 않은 '지슬', '노리개'와는 달리 '또 하나의 가족'에는 얼굴을 드러낸 수많은 백혈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고 황유미씨와 같은 삼성 백혈병 사망자는 58명, 발병자는 151명에 이른다.

한편 '또 하나의 가족' 이외에 삼성을 다룬 또 하나의 고발영화 '10년 전쟁'도 개봉을 앞두고 있어 주목된다. '10년 전쟁'은 조성구 전 얼라이언스시스템 대표가 삼성 SDS와 10년간 벌인 법정싸움을 다뤘다.

제작비 마련 힘들어? 관객이 직접 나선다!


김현준기자




민감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의 경우 대기업과 매니지먼트들이 참여를 꺼리는 까닭에 제작비를 마련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관객들이 직접 돈을 모아 영화를 제작하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중들로부터 자금을 모은다'라는 뜻을 지닌 크라우드 펀딩은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자금을 충당하는 투자 방식이다. 대부분 목표액과 모금기간이 정해져 있고 기간 내에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하면 해당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기 때문에 후원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홍보를 돕기도 한다. 독립영화를 비롯해 영세한 예술 분야에서 주로 이용된다. 국내 영화로는 지난해 개봉된 '26년'에서 처음 이용됐다.

'지슬'은 총 제작비 2억5,000만원 중 상당 부분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채워 눈길을 끌었다. 촬영 단계에서는 제주도 지역 문화계 인사들과 주민들이 7,000만원의 제작비를 보탰고 후반 작업 비용 또한 온라인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의 모금액 1,430원으로 충당했다.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후원금액에 따라 엔딩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거나 DVD, 시사회 초대권, 제주산 감자로 보답했다.

'노리개'도 소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민감함 때문에 제작과 투자, 캐스팅 등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2월 13일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 3일 만에 1,000만원 넘는 금액이 모여 힘을 실어줬다.

4월 18일로 개봉일이 확정된 '노리개'는 3월 15일로 고지됐던 기존 마감일까지의 모금 기간이 너무 짧다는 후원자들에 요청에 따라 3월 31일까지로 기간을 연장했다. 모금된 금액은 영화 홍보용 제작물과 광고비, 시사회 개최비용 등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또 하나의 가족'도 크라우드 펀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또 하나의 가족'은 지난해 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2,071명으로부터 1억2,000만원 가까운 제작비를 모았고 지난 2월 21일에는 '제작두레'가 시작돼 다시 제작비를 모으고 있다. '또 하나의 가족' 제작진 측은 약 10억원의 전체 제작비 중 절반인 5억원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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