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소금 관련 일 해와… “좋은 소금 싼 가격에 널리 나눠지길”

올해 86세, 60년 이상 소금 일에 매달려… “배운 것 아들에 물려줘 다행”

햇볕ㆍ바람ㆍ온도 맞아야 질 좋은 소금 완성…최고 품질의 천일염 다뤄

“경상도 사람들 목포(신안) 소금을 최고로 치는 건 ‘발’이 좋아서”

“소금은 공익사업… 위생적으로 관리하고, 싼 가격에 널리 나누길 바래”

노인은 연세가 많다. 올해 여든 여섯이다. 지난해까지는 비교적 기억력이 좋았다. 예전 일들을 대부분 기억했다. 지난 겨울 많이 아팠다. 올해 들어서는 부쩍 기억력이 떨어진다. 본인은 모른다. 연대를 맞추는데 한참을 생각한다. ‘겨울철 많이 편찮으셔서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인터뷰에 동석한 둘째 아들이 대신했다. 60년 이상 몸을 담았던 ‘소금 관련 일’을 들었다. 목포에서 ‘흥농염업사’를 운영하는 최기철씨 이야기다. 미리 밝힌다. 군데군데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소금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힘들었다.

소금을 개인적으로 팔다 들키면 몰수를 했지

아버지는 당목(唐木) 공장에서 일을 했다. ‘당목’은 서양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천이다. 광목보다 곱고 희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들어온 서양, 일본, 중국 문물 중 하나다. 목포는 항구다. 일본으로 많은 물자가 나가고, 일본에서 많은 문물이 들어왔다. 목포는 착취의 통로였다.

집안은 그저 근근이 먹고 살 정도였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밥은 먹고 살 정도. 상세하게 이야기하진 않지만 부모는 아들의 학업에 열성적이었다. 1남2녀의 외동아들. 다행히, 소년 최기철은 공부를 잘했다. 목포 서부국민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했다. 6년제 상업학교. 고 김대중 대통령이 다녔던 바로 그 학교다. 한국전쟁 직후에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의 전매청에 취직했다.

전매청은, 말 그대로 국가가 독점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고 관리하는 조직이다. 얼마 전까지 담배와 인삼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국가만 사들이고 팔 수 있었다. 당시는 소금도 바로 그러했다. 소금은 오래지 않아 전매품목에서 빠졌다.

“소금이 귀했어. 그러니까 전매품으로 묶어 놓고 국가가 관리했지. 목포는 인삼이 나지 않으니까 전매품이 소금하고 담배야. 그중 소금이 더 많았지. 목포 전매청에 들어갔으니 늘 소금 관련 일을 했지.”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소금이 부족하니 수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외화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서해안 일대 특히 신안의 소금 생산을 장려한다. 염전 등에 보조금을 주고 독려한다. 염전 개발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천일염

천일염은 1907년 인천 주안염전이 그 시작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자국과 대만에는 정제염 공장을 세웠다. 착취의 대상인 한반도에서는 천일염을 장려했다.

원래 한반도의 소금은 ‘자염(煮鹽)’이다. 구운 소금이다. 가마솥에 염도를 높인 바닷물을 넣고 장작불로 끓인다. 가마솥에 진한 바닷물을 넣고 끓인다고 생각하면 비교적 정확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정부는 소금 생산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 때로는 전매품목으로 정하여 소금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사로이 소금 굽는 일을 허락하고 세금으로 ‘염세(鹽稅)’를 걷기도 했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자염에 대한 염세를 9등급으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다산은 소금 굽는 가마솥을 상세히 나눈다. 무쇠 가마솥과 흙(황토)으로 만든 가마솥으로 나눈다. 무쇠 가마솥이 아무래도 튼튼하고 생산량도 넉넉하다. 땔감이 흔한 곳도 있고 귀한 곳도 있다. 땔감과 가마솥의 거리도 감안한다. 땔감을 구하는 곳과 가마솥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생산량이 떨어진다. 조선시대 기록에 “소금 굽는다고 나무를 다 베어가서 군용 배를 만들 나무가 없어지고 있다”는 보고서도 있다. 가마솥, 나무 그리고 소금 굽는 일을 하는 염부(鹽夫) 문제는 조정과 지방 관청의 골칫거리였다. 소금은 늘 부족했다.

최기철씨가 목포 전매청에서 일을 할 무렵에도 소금은 부족했다.

“나는 상업학교를 나왔으니 주로 회계나 장부 정리 같은 일을 했지. 그런데 소금 감시과도 있었어. 감시과는 소금을 누가 몰래 팔지 않는가, 그걸 감시했어. 전매품이니 개인이 팔고 사면 큰일이지. 소금 팔다 걸리면 그 물건을 모조리 압수했어. 무상몰수야. 당시엔 소금이 공익사업이야. 정부가 나서서 개간을 장려하고 보조금도 주고, 융자도 해주고 그랬지. 소금 생산업자들은 정부나 지방관청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어.”

몇 해 동안 전매청에서 일을 하다가 ‘병역 문제’로 전매청을 그만두게 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병역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던 것이 새삼 문제가 된 것이다.

“아는 게 소금 관련 일밖에 없으니까 어떡해? 소금 관련 일을 해야지. 근데 바로 소금 일을 하기에는 돈도 없고, 현장도 잘 모르고….”

그래서 시작한 일이 소금을 담는 가마니를 중개해주는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서 거래했다. 그는 가마니 중개로 ‘염전에 발을 디뎠다’.

태안, 변산 일대에서도 소금이 생산되었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금의 주 생산지는 신안군의 비금, 암태, 도초, 하의, 신의, 지도, 임자 등 여러 섬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목포(신안) 소금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있어. 목포 소금이 ‘발’이 좋아. 당시는 자동차가 귀하니까 소금을 배로 실어서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운반했어. 아니면 기차로 가거나. 그때 목포의 발이 좋은 소금을 먹어본 경상도 사람들이 목포 소금을 최고로 치지.”

‘발’은 소금의 굵기를 뜻한다. 신안 소금의 ‘발’이 좋다는 것은 굵기가 적당하고 색깔이 희다는 뜻이다. 흔히 “신안 소금은 발이 굵고 변산 소금은 발이 잘다”고 표현한다. 소금은 계절, 지역에 따라 다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날씨 중 온도와 더불어 ‘바람’이다.

“봄, 가을 소금은 발이 잘아 좋지 않지. 여름 소금이 발이 굵고 좋아. 60년 이상 소금 관련 일을 했으니까 소금 맛이야 늘 느끼며 살지. 여름 소금이 덜 짜고 달아. 당연히 우리 집에서도 우리 소금 먹어. 1∼2년 정도 간수 빼고 그걸 먹지. 예전 소금 하고 지금 소금하고 비교하면서 같냐, 다르냐, 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소금이 달라질 일이 있어? 같아.”

최기철씨가 이야기하는 ‘여름’은 5월 중, 하순부터 7월의 우기 전까지다. 기온이 27도 정도를 넘기고 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이때는 ‘당일채염(當日採鹽)’도 가능하다. 햇볕과 바람, 온도 등이 적합하면 하루 만에 소금이 완성된다. 2∼3일 이내에 만든 소금을 현지에서는 최고로 친다. 비가 오고 바람이 약하며 기온이 떨어지면 소금을 만드는데 20일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어렵게 만든 소금이지만 불행히 소금의 질도 그리 좋지 않다.

염전에서 겪는 가장 큰 애로점은 습기와 비다. 소금은 바닷물을 육지로 끌어들여 건조시켜서 만든다. 비가 오면 그동안 염도를 높인 바닷물을 ‘염수 저수지’로 보낸다. 날씨가 좋아지면 그 물을 다시 염전으로 당긴다. 이 과정을 일일이 사람 손을 빌어서 해야 한다. 목포, 신안 현지에서는 ‘염전 한판’을 5천∼1만평으로 셈한다. 넓은 염전에 짠 바닷물이 오간다. 일부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과정을 사람 손을 거쳐야 한다. 소금 만드는 일을 꺼리는 이유다.

최기철씨는 ‘가마니 중개하는 일’을 하다가 얼마간의 돈을 모아 염전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신안군 암태도에,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다시 목포시 달동에 또 다른 염전을 샀다. 상당수의 염전이 ‘도조제(賭租制)’로 운영한다. 소금 일이 힘드니 염부가 되려는 이는 드물다. 도조제는 몇 사람이 팀을 짜서 염전의 운영을 한 해 동안 맡는 식이다. 급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소금을 계약서대로 나눈다.

최기철 씨의 염전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조제로 받은 소금을 목포의 ‘염업사(鹽業社)’에서 판다. ‘염업사’는 이제는 사라진 이름이다. 그는 수십 년간 염업사를 운영했다. 소금 파는 일을 한 것이다. ‘염업사’ 운영은 둘째 아들 최완수씨에게 물려주고 있다. 맏아들 최광수씨는 인근 무안에서 재제염(再製鹽)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재제염은 천일염을 물에 녹인 다음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시 끓여서 잘게 부순 것이다. ‘꽃소금’이라고 부른다.

아흔에 가까운 최기철씨는 매일 염업사에 출근한다. 1층은 염업사, 위층은 살림집이다. 아흔 살 가까운 노인이 매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오후 5시까지 ‘근무’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반드시 출근, 근무시간을 지킨다.

“내가 처음 소금 일을 할 때 소금은 공익사업이었어. 예나 지금이나 소금이 공익사업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 소금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하지 말고 위생적으로 관리하고, 싼 가격에 널리 나누면 좋겠어. 예전하고 달리 사람 손이 귀해지니 천일염 만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지. 그렇다고 가격을 함부로 올릴 수도 없고.”

60년 이상 소금 관련 일을 해오는 동안, 소금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식용의 ‘공익사업’이다가 ‘광물’로 바뀌었다. 외국산 소금이 들어오고 기능성 소금도 등장했다. 최기철씨는 ‘젊은 시절 배운 것’이 소금 일이어서 60년 이상 소금 관련 일을 했다. “배운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니 그나마 나는 다행이지.”

소금창고에서 소금 푸대를 보는 눈길이 퍽 맑고 따뜻했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캡션

-최기철씨와 둘째 아들 최완수씨. 흥농염업사는 최완수씨가 물려받고 있다. 장남 최광수씨는 가까운 무안에서 제재염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최기철씨는 올해 86세. 60년 이상을 소금 관련 일을 했다.

-목포, 신안 소금은 ‘발’이 좋아 특히 영남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소금창고 안의 소금 푸대들. 사진의 소금은 2013년 신안 암태도 천일염이다.

목포의 맛집들

독천식당

낙지 전문점이다. 낙지를 칼로 잘게 다진(?) ‘탕탕이’를 비롯해 낙지비빔밥, 낙지연포탕이 아주 좋다. 3∼4명이 가서 다른 메뉴를 주문하고 여러 가지를 다 맛볼 것을 권한다.

금메달횟집

30여년의 업력을 가진 홍어전문점이다. 국산 흑산도 홍어만 고집한다. 가격은 높은 편이지만 홍어 마니아들은 반드시 찾는 집이다. 당연히 홍어는 직접 삭힌다. 반찬도 수준급.

영란식당

민어전문점이다. 사시사철 민어가 가능하다. 민어회도 좋지만 민어탕을 추천한다. 국산 민어만 고집한다. 민어애가 들어간 음식들을 맛보도록. 가게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다.

유달콩물

목포의 상징물 중 하나는 유달산이다. 유달콩물도 목포를 상징하는 콩물을 내놓고 있다. 투박하지만 걸쭉하고 맛있다. 패트 병에 넣은 콩물을 테이크 아웃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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