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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맛집(245)] ‘옛집식당’ 김광자

50년 넘게 쇠고기 국밥 ‘한길’…질 좋은 재료와 정성스런 맛으로 ‘명성’ 이어가

‘옛집식당’ 1953년 열어… 김광자씨 1963년 무렵 ‘국밥 전문점’으로

쇠고기로 국물 내고, 재래 간장으로 간을 잡고, 끓이는 노하우로 ‘특별한 맛’

“수십 년 단골이었던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맛, 훈훈한 국 맛을 보여주고 싶을 뿐”

설탕.

엉뚱하게도 이야기의 시작은 설탕이었다. 질문은 “어떤 이유, 경로로 육개장 집을 시작하게 되었는가?”였다. 대구 달성공원 부근의 유명한 육개장 전문점 ‘옛집식당’. 도무지 설명하기 힘든 꼬불꼬불한 골목안의 자그마한 집.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고 낡은 한옥이다.

며느리, ‘국밥전문점’으로 단일화하다

“시집을 왔더니 설탕부대가 집안 여기저기 흔하게 있더라고. 속으로 ‘시집이 잘 사는구나’라고 생각했지.”

전쟁이 끝나고 10년쯤 세월이 흘렀을 때다. 군데군데 무너진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친정인 경북 성주도 마찬가지. 누구나 가난했고 김광자씨(1943년 생)의 집은 더더욱 가난했다.

농사 열 마지기. 작은 밭뙈기가 하나 있었다. 빤히 보이는 가난한 살림살이인데 그나마 친정아버지는 농사를 잘 짓는 이가 아니었다. 살림살이는 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면사무소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살림살이는 늘 힘들었다.

설탕 이야기가 나온 이유다. 김광자씨가 어렸던 시절, 설탕은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높은 곳에 설탕그릇을 올려놓으면 어린 마음에 그 단맛을 잊지 못해 까치발을 하고 설탕그릇을 끄집어 내렸다. 시집을 오니 설탕이 자루째 굴러다녔다. 얼핏 보고 ‘잘 사는 집이구나’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행복한 오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스무 살 언저리의 새 신부는 오래지 않아 시집 역시 친정 못지않게 가난한 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집오니까 시어머니가 칼국수와 국밥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 다들 어려우니까 장사하는 건 흉이 아닌데 문제는 사는 집이 우리 집이 아니고 세를 살고 있었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30평 남짓한 집의 집세가 1년에 20만원이었다. 1963년의 일이다. 제법 괜찮은 직장인이 한 달 급료 1만원을 받기 힘들 시절이었다. 집세 20만원은 견디기 힘든 금액이었다.

시어머니 차천수씨는 1953년 처음 가게 문을 열었다. 마흔을 넘긴 나이였다. 원래 달성공원과 ‘옛집식당’ 부근은 장터였다. 한양과 마찬가지로 대구 역시 도심이 있고 변두리 외곽지 그리고 대구에서 먼 시골이 있었다. 이 부근은 주로 땔감을 져다 나르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전쟁 전인 일제강점기부터 인근의 나무꾼들이 이 일대에 나무를 부리고 그 나무를 팔거나 도심 속으러 져다 날랐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서고, 시장이 서면 당연히 밥을 먹을 공간이 필요하다. 깊은 골목 안의 가게가 그나마 운영이 되었던 이유다.

갓 시집온 젊은 새댁은 시어머니의 ‘밥집’ 일에 참여하면서 ‘개혁’을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끓여내는 칼국수는 맛있었다. 소뼈를 고아서 육수를 내고, 고명으로 쇠고기를 사용했다. 깨와 땅콩까지 적절히 섞으니 맛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손님들 반응도 좋았다. 문제는 일만 많고 바쁠 뿐이지 돈이 남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손님이 한사람 오면 한사람 분량의 국수를 썰어서 삶고, 두 사람이 오면 두 사람 분량의 국수를 썰어서 삶아야 했다. 하루 종일 일이 끊어지질 않았다.

메뉴를 재조정하기로 했다. 칼국수와 국밥을 같이 내던 집에서 과감하게 칼국수를 버렸다. 어른들에게 조심스럽게 건의를 했다. “칼국수도 맛있고 반응도 좋다. 국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가지만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국밥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1년 동안 묵묵히 일을 해낸 며느리의 ‘건의’였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하자”고 선선히 승낙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옛집식당’의 업력을 두고 60년을 넘겼다고 하면 시어머니 차천수씨가 시작한 1953년을 기점으로 셈한 것이고, 50년을 넘겼다고 하면 며느리인 김광자씨가 ‘국밥 전문점’을 시작한 1963년 무렵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시어머니는 1995년 84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며느리의 ‘제품단일화’로 오늘날의 ‘옛집시당’은 자리를 잡았다.

육개장인가, 대구국밥인가?

육개장은 개장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시대 내내 상식(上食)했던 것은 개장국이다. 1910년 언저리 경부철도가 건설되었다. 원래 감영이 있던 도시였던 대구는 일약 교통의 중심지가 된다. 대구 약전골목 언저리 등도 덩달아 전국적인 시장으로 재탄생한다. 대구에 장터가 많으니 장터 나들이 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진다. 시장에 사람이 모이면 늘 음식을 해결할 크고 작은 음식점이 생긴다. 조선 후기부터 한반도에도 개고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대륙을 지배했다. 만주족은 전형적인 기마, 수렵민족이다. 수렵민족에게 ‘개’의 존재는 각별하다. 사냥의 동료이고 때로는 사람과 개가 같이 잠을 잔다. 가축이라는 느낌보다는 동료, 전우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수렵민족에게 ‘사람을 구한 개 이야기’가 흔한 이유다.

조선도 청나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후기 청나라에 갔던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 중국인들을 본다. 일부는 개고기를 먹지 않은 대열에 선다.

경부철도가 건설된 후 시장이 서고, 밥집들이 섰을 무렵 한반도에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쇠고기를 파는 집들도 늘어났다. 여전히 음식은 ‘장국밥’이었다. 쇠고기를 사용하는 집은 육개장이라고 이름붙였다. 바로 쇠고기 국밥이다.

“음식 맛이 강하다가, 요즘에는 맑은 음식들을 좋아해. 건강을 생각하니까 맑은 음식들을 좋아하더라고.”

작은 양의 토란대와 무 등을 사용한다. 고사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국물 맛이 강하지 않고 달다.

블로그들은 이집에 와서 늘 쓰레기통을 보고 ‘안심’한다. 대파의 푸른 부분은 상당수 버린다. 대파는 흰 부분을 주로 사용한다. 쓰레기통에는 대파의 푸른 부분들이 수북이 버려져 있다.

“대파의 흰 부분이 주는 단맛이 있지. 푸른 부분은 대부분 잘라내고 흰 부분 위주로 써요. 토란과 무는 아주 조금 사용하고 고기 삶을 때 나오는 물도 적절한 양만 사용하고. 그러면 국물 맛이 달고 깊지요.”

실제 ‘옛집식당’의 육개장은 정확한 육개장의 형태는 아니다. 고사리, 토란대 등을 많이 사용하는 대구식 전통 육개장의 관점에서 보면 ‘옛집식당’의 육개장은 무와 고기를 많이 넣은 장터국밥에 가깝다. 선지를 사용하지 않는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육개장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손님들마다 식성이 다르고 시대 별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도 달라지고, 다 맞출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식성대로 맞춰주려고 노력합니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대파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결코 간단치 않다. 우선 시장에서 손질한 대파는 구하지 않는다. 평소 좋은 대파를 주는 집을 정해두고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다. 그마저 겉껍질을 몇 번 벗겨낸다. 김 씨는 “같은 흰 부분이라도 겉을 서너 번 벗겨낸 속고갱이와 흙 묻은 부분만 덜어낸 것은 맛이 다르다.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으니 소뼈를 곤 육수도 사용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소뼈를 우려낸 국물을 육수로 썼지만 지금은 기름기가 적은 쇠고기 부분을 우려낸 국물로 맛을 낸다. 기름기가 적절히 있어야 나물도 맛있고 국물도 구수하지만, 이즈음에는 기름기, 고기를 질색하는 이들이 많으니 가능하면 가벼우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을 만들도록 노력한다.

비법이라면 비법이랄 수도 있는 ‘맛있는 국 끓이는 방법’은 몇 가지 더 있다.

첫째는 조선간장의 힘이다. 국밥, 국을 끓여내는 이들 중에 소금 간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시중에서 파는 산분해간장을 사용하면 맛은 간단하게 정리된다. 간장에 들어 있는 지나친 조미료가 국물 맛을 조정하는 식이다. 피하는 이들은 소금을 사용한다. 김광자씨는 고집스럽게 조선간장, 재래간장으로 간을 잡는다.

둘째는 끓이는 방식이다. 의뭉한 불로 시작해 가능하면 오래 끓인다. 어느 정도 끓인 상태가 되면 불을 끄고 국을 식힌다. 85% 정도 끓이고 불을 끈다는 표현도 있지만 ‘대략’ 끓인 다음, 불을 끄고 국이 담긴 통을 물에 담아서 식힌다. 손님이 오면 다시 한소끔 끓여서 내놓는다. 계속 끓인 국물과 한번 식힌 다음 끓인 국물은 맛이 다르다. 식혔다가 다시 끓인 국물은 좋지 않은 단내가 나지 않고 잘 상하지 않는다. 기름기와 어설픈 단맛을 지역사투리로 ‘는적거린다’고 표현하는데 ‘는적거리지’ 않는다.

음식은 정성으로 만든다. 정성은 만드는 이 입장에서는 힘들고 고단한 작업이다. 하기 좋은 말로 “국 끓이는 걸 보면 1만5천원 받아도 되겠다”고 하지만 당장 가격을 올릴 생각도 없다. 어려운 시절 ‘국밥 팔아서’ 세 살던 집도 사고 옆집도 사서 붙였다. 2남1년 번듯하게 공부도 시켰다. 이만하면 스스로 장하다 싶다.

둘째 아들 내외가 ‘옛집식당’을 물려받겠다는 것도 대견스럽다. 형식적이지만 법적으로 둘째 아들을 ‘사장’으로 내세웠다. 국밥 끓이는 일만 하고 있다. 작은 가게지만 하루 국밥 100그릇 파는 가게의 운영은 온전히 둘째 아들의 몫이다.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국 끓이는 일을 할 작정이다. 수십 년 단골이었던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맛, 훈훈한 국 맛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설명

- ‘옛집식당'의 주인 김광자씨와 둘째 아들 박무득씨. 60년 이상을 이어온 ‘가업’을 이들이 잇겠다고 나섰다. 아들이 사장, 어머니는 주방장 일을 하고 있다

-오래된 집이지만 늘 정갈한 음식을 내놓으려 노력한다. 기름이 튀는 곳을 신문지로 덮었다.

-국밥과 두부 두 조각. 쪽파무침, 마늘 다진 것, 고추절임 등이 밥상의 모두다. 정겨운, 앞으로 잘 지켜나가야 할 ‘김광자표’ 육개장이다.

- ‘옛집식당’ 육개장

-오래된 골목이다. 집도 낡았지만 골목도 1960년대의 정취가 제대로 살아있다.

국밥 맛집들

국일따로국밥

대구의 따로국밥 노포다. 80년의 역사, 가장 오래된, 가장 대표적인 대구 따로국밥집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따로 내오는 마늘 양념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맛 포인트.

벙글벙글집

무와 대파, 고기 등이 잘 조화된 달고 시원한 국물. 얼마쯤은 도회지화 된 맛이다.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있다. 젊은 층들도 좋아하는 맛. 김과 쪽파무침이 아주 맛있다.

황소한마리육개장

엉뚱하게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전통육개장집이다. 고사리, 토란대 등과 더불어 거세하지 않은 황소고기로 전형적인 육개장을 내놓는다. 밑반찬들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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