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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23] 머천다이저 최재관
장사꾼 최고의 작전사령관
유통업계의 만능 일꾼, 아이디어로 전국 100여개 점포 관리


설날이 다가오면 최재관(43)씨도 비상이다. 그는 LG유통 조리식품팀 팀장이자 부장급 머천다이저, 즉 MD다. 자사 계열의 수퍼마켓과 편의점, 백화점의 식품매장 등이 그의 근무 현장이다. 상품을 사고 파는 시장전략엔 노련할대로 노련한 13년차 베테랑이지만, 이맘 때만 되면 언제나 새로운 전쟁이다. 명절은 유통시장에서도 놓칠 수 없는 반짝 대목. 하다못해 특선 선물세트의 내용물 구성이나 가격 폭까지 이들의 머리에서 나온다. 농수축산물의 경우, 아예 명절 5일전부터 대형점포에 MD들이 비상투입된다. 뒷짐 감독이 아니라 직접 상품대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손님을 불러모으는 판매원으로 변한다.

“저희에겐 네 일, 내 일이 따로 없습니다. 상품 기획에서부터 판매, 배송, 심지어 고객 불만사항 처리까지, MD가 안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최씨는 유통업계에서 알아주는 일꾼이다. 현장 배달 일부터 시작해 점포의 부점장, 점장 등을 고루 거쳤다. 다룬 물품만으로도 수산물, 야채, 가공식품, 생필품 등 안 다뤄본 것이 거의 없다. 냉장, 냉동 식품을 포함해 매일 교체되는 상품들로 구성된 ‘일배’팀이란 것을 처음 제안하고 가동시킨 것도 그였다. 종전의 물류 관리 방식과 다른 ‘밴더’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자사에 도입시킨 것도 최씨. 머무는 곳마다 매년 30~40%씩 판매고를 올려놓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최우수 사원상을 두 차례나 받은 것도 사내에서 유일한 기록이다.



좋은상품찾기 ‘입소문도 놓칠세라…’

굳이 명절이 아니라도 MD에게 여유란 없다. 최씨팀의 경우, 관리해야 될 체인 점포수만 전국에 약 100개. 적게는 하루 1,000여만원에서부터 7억~8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점포까지 다양한 규모다. 대형 수퍼마켓의 경우 한 점포에 들여놓는 품목만 쳐도, 식품류만 1,500여종에 이른다. 그 많은 점포마다 산더미처럼 드나드는 물건은 물론 현장의 판촉사원 등 근무인력 관리까지 맡는다. MD들이 쉴 수 없는 이유다.

좋은 상품을 찾는 것부터가 MD의 고민이다. 신문이나 방송은 물론, 주위의 입소문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상품을 쫓아다니느라 최씨는 전국의 공장이란 공장은 안 찾아가 본 곳이 없다. 자동차 주행기록만 3년에 14만킬로미터쯤 된다.

물건이 판매대에 올라간 뒤에도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잘 팔리면 잘 팔리는 대로 긴장을 풀지 못한다. 자리만 차지한 채 먼지만 쌓이는 상품은 바로 퇴출감이다. 특히 식품류는 유통 수명이 짧아 더 애물단지다. 시간과 재고량을 수시로 점검해가며 필요한 경우 세일을 해서라도 빨리 팔아치워야 한다. 전국에 점점이 흩어진 점포마다 개별 판매상황이 시시각각 자체 전산망을 통해 MD들에게 자동보고된다. 기획행사도 수시로 터뜨려야 한다. 계절이나 절기, 테마별 행사 등 만들어내야 할 행사만 사흘에 한번꼴로 돌아온다.

너무 잘 팔려도 문제. 유통업체들 사이에 물량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머천다이저들간의 대리 전쟁이다. 돈만 내민다고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아니다. 한 상품이 뜨고 지는 것은 하루 아침의 운명. 많은 변수가 걸려있다.

“모 브랜드 맥주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다들 물량이 동이 나서 유통업체 MD들마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난리를 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들에게는 오히려 해당업체가 자진해서 “다른 곳에 못 주는 한이 있어도 당신들에게는 2배로 주겠다”며 현금도 아닌 어음 지불 조건인데도 두뻬坪?무조건 공급해 줬어요. 그전에 거래 규모가 적을 때에도 다른 곳과 달리 인간적으로 대해줬다며 보답한다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피차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로는 부득이 악역을 맡기도 한다. 판매실적이 저조한 등 피치못하게 거래업체를 물갈이해야 할 때다. 운을 떼는 입장도 편할 리 없지만, 생존이 걸린 해당업체의 경우는 당연히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막무가내로 ‘절대 못 나간다’며버티는 업체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한번 터지면 MD는 피가 마른다.

“한겨울에 매일 새벽마다 해당업체 사장님 집에 찾아가 문 앞에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린 적도 있어요. 거의 빌다시피 밥 사고, 술 사드리면서 사정하고, 호소해 간신히 사태를 마무리하고도 또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조마조마하지요.”



업체들 담합에 봉변도

업체들의 담합에 봉변을 당하기도 일쑤. 물량이나 가격 등, 조금만 수 틀리면 동종 업체들끼리 뭉쳐 공급 중단으로 압박하는 경우다. 까딱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한때 모 제과업체와 치른 일전도 최씨에게는 자못 비장한 싸움이었다.

“그렇게 싸게는 못하겠다며 제과업체 3사에서 담합해 납품을 거부한 적이 있었어요. 문제를 해결 못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거래업체를 찾아가 ‘불공정 거래로 소송을 제기하겠다’ 등등 엄포반, 설득반으로 아주 강력하게 밀고 나갔어요. 결국 다음날부터 납품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나왔죠.”

식품류는 특히 다루기 까다로운 품목. 유통 수명도 짧은 데다 기온이나 습도 등에 민감해 변질 사고가 일어나기 쉽다. 여름철 비브리오균 소동 등 철마다 유행처럼 돌아오는 상습 타격에다 최근과 같은 광우병 파동 등 수시로 동반 피해를 입는다. 특히 냉장, 냉동 식품은 요주의중에서도 요주의 품목이다. 운반도중 차량의 냉동칸 문만 특정 횟수 이상 여닫혀도 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 점포마다 환경도 제각각이다 보니 사실상 완전 무사고란 불가능하다. 판매 후 민원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확인, 조치하는 것도 MD들이다. ‘맛이 없다’는 불평에서부터 심하면 식중독 사고 등 하루 평균 7~8건은 꼭 터진다. 어떻게든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제조업체 대신 화살을 맞기 십상이다. ‘하루에 두건 이상 안 터지면 재미가 없어 못산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MD들에겐 요란하고 일상적인 소동들이다.

“스트레스로 치면 이만큼 스트레스 쌓이는 일도 없지요. 매일 열 받아요. 하지만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만큼 그에 대한 작전을 짜고 하나하나 성공시켜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겐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어학파. 88년 현재 LG그룹의 모체인 ‘희성산업’에 입사, 유통팀에 배치되면서 묘한 인연이 시작됐다. 판매현장에 대졸사원이 공채, 투입되기로는 첫 기수였다. 처음 맡은 일이란 것도 서울 신반포에 있는 한 슈퍼마켓의 배달 일이었다. 자전거에 맥주를 싣고 가다 떨어뜨려 깨먹기도 하고, 양손에 쌀자루를 든 채 낑낑대며 아파트 5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만 쌀자루를 놓쳐 자루가 터지면서 쌀이 폭포수처럼 흘러 계단을 타고 흐르는 낭패도 겪었다. 배달하러 간 집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과 마주치기도 했다. ‘학교 때 우등생이 고작 수퍼마켓 배달꾼이 됐냐’는식으로 말하는 친구에게 오히려 ‘앞으로 우리 가게를 많이 이용해달라’고 씩씩하게 말하고 나왔다.

“솔직히 처음엔 그만둘까 생각도 했어요. 대학까지 나온 허우대 멀쩡한 놈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그런데 같이 입사한 동기들을 보니까 한 사람도 그만둔 사람이 없더라구요. 마음을 고쳐먹고 여기서 승부를 걸어보자고 결심했어요.”



“장사 묘미에 흠뻑빠져 살았죠”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다. ‘이 일이야말로 내 체질’이라는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장사의 묘미에 빠져버렸다.

“예를 들어, 사과를 판다 치면 박스를 풀어서 좋은 사과는 좋은 것대로 천원 더 받고 팔고, 못한 것은 못한 대로 따로 팔면 오히려 사과를 박스째 파는 것보다 더 이익이 날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원하는 대로 된다는 게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스스로 재미를 느끼며 일하는 사람의 진로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부점장, 점장일 때도 최씨는 수시로 가게 앞에 물건을 내다 놓고 직접 목청껏 손님을 불러모으곤 했다. 어느 해 겨울엔 만두 100상자를 2시간만에 팔아치운 기록도 있다.

머천다이저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최씨의 입사 후 수년 뒤의 일이다. 타고난 배포에다 승부욕, 호기심까지 뭉쳐진 최씨. 직접 일본어 원서까지 번역해 ‘MD란 무엇인가’ 란 지침서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상품개발에서부터 MD의 판매 기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문 자료들을 공부하며 수시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성공쳔객?열성MD였다.

그 중에서도 자체 브랜드 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종이컵은 지금도 스스로 흐뭇해 마지않는, 본인 최고의 작품이다. 디자인 선정 과정에서부터 변변한 공장도 없는 할머니ㆍ할아버지 부부의 일 솜씨에 반해 일을 맡기기까지 자신의 발로 뛰어다니며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요즘도 TV의 촛불시위 뉴스나 드라마 등에서 우연찮게 이 종이컵을 발견할 때면 초등학생 아들을 쿡 찔러댄다. “저 컵을 바로 니 아빠가 만들었단 말이다!” MD라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일배 팀장을 거쳐 현재의 조리식품팀으로 건너온 것이 작년 일이다. 동시에 MD 생활 13년중 가장 험한 암초를 만났다. 김밥이나 만두 등, 점포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이 조리식품. 동종업계에서 몇 년간 독주를 누리던 이 분야에 최근 경쟁사들이 너나없이 뛰어들면서 타격을 받은 데다 경기불황까지 겹친 이중고 속에서 최씨가 총대를 맨 것이다. 그에게는 IMF 때보다 더 비장한 악전고투다. 와중에도 아이디어맨답게 새 제품을 개발하고 레시피를 규격화하는 본부석 격인 ‘중앙 식당’제도를 도입해 운영하는 등, 힘겨운 한 해를 보냈다.

“그래도 작년에 고생한 덕분에 올해부터는 경기만 도와준다면 순탄하게 나아갈 것 같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해는 연말까지도 말썽이었다. 수원의 한 시범점포에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보이던 ‘즉석 통닭’ 이벤트가 행사마감 사흘을 남겨두고 ‘조류 독감’으로 폭격을 맞았다. 전국으로 확대해 20만 마리를 팔려던 야심찬 계획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주저앉을 그가 아니다. 비록 닭은 안 도와줬지만, 못지않은 새 작전들이 이미 머릿속에 빽빽이 걸려 있다.

“다음엔 장어나 새우로 한번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또 설날 무렵엔 가족의 즉석 만두빚기 행사도 준비 중이고, 그리고 또….” 말을 끊어 볼 틈도 없이 달변의 MD 최씨의 작전스토리가 끝도 없이 쏟아진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pinplus@empal.com


입력시간 : 2004-0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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